논평이슈브리핑
[신년기획 특별논평 시리즈] ⑤ 2026년 인도·태평양 전망과 한국의 과제
박재적
연세대학교 교수

Editor's Note

박재적 연세대 교수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동맹 경시와 보호무역 정책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태평양 안보네트워크는 다양한 소다자 협의체의 중첩을 통해 내구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저자는 미국이 ‘악의적 패권국’의 성격을 보이며 국제질서의 공공재 제공에 소극적인 틈을 타, 중국이 대안적 다자 제도를 구축하고 규범 경쟁을 시도하며 역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박 교수는 이러한 격변기 속에서 한국이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에 단순한 참여를 넘어 역내 거점 중견국들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함으로써, 지역 질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질서 형성자(order-builder)’로 도약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026년 신년기획 특별논평 시리즈 개요


동아시아연구원은 새해를 맞아 급변하는 세계질서와 국제정세를 전망하는 「2026년 신년기획 특별논평 시리즈」를 발간합니다. 2026년 국제정치는 미·중 전략 경쟁의 구조화, 동맹 질서의 재편, 지정학과 경제·기술 안보의 결합, 그리고 인공지능과 군사·안보 환경의 급속한 변화가 중첩되는 전환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중견국과 지역 질서 전반에 새로운 선택과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미국을 출발점으로 일본, 중국, 인도·태평양, 국제정치경제, 인공지능(AI), 국방, 북한, 유럽에 이르기까지 주요 행위자와 핵심 이슈를 순차적으로 조망함으로써, 2026년 세계질서의 구조적 변화와 그 함의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합니다. 각 논평은 단기적 현안 분석을 넘어 중장기 전략 환경을 진단하고, 한국 외교·안보 전략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2026년 신년기획 특별논평 시리즈」 발간 순서


1. EAI 선정 2026년 국제정세의 10대 트렌드 [논평 읽기]

2. 미국 [논평 읽기]

3. 일본 [논평 읽기]

4. 중국 [논평 읽기]

5. 인도·태평양 [논평 읽기]

6. 국제정치경제 [논평 읽기]

7. 인공지능(AI) [논평 읽기]

8. 국방 [논평 읽기]

9. 유럽 [논평 읽기]

10. 북한 [논평 읽기]


   

I. 들어가면서

 

최근 몇 년간 급부상한 인도·태평양 공간은 상당 부분 미국에 의해 가공된 전략적 공간인바, 2025년 인도·태평양 국제질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이 가져온 혼돈과 불확실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동맹 경시와 다자 무역 질서를 파괴하는 양자 무역 협상 행태로 미국 인도·태평양 전략의 내구력과 지속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미국 우선주의와 선택적 개입주의에 집중하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연대, 연결, 집단안보로 대표되는 네트워크 안보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공재 제공을 통해 역내 국가들의 신뢰와 지지를 확보하려는 의지도 제한적인데, 2025년 1월 초 시행된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자금 지원 중단과 7월의 USAID 폐지는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한다. 나아가 아시아와 유럽의 안보를 연계하려는 전략적 구상에도 소극적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한때 미국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인도·태평양’ 대신 ‘아시아·태평양’이라는 용어 사용 빈도가 증가하면서, 미국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전략적 의지가 약화되고 있다는 주장도 대두된 바 있다. 그러나 2025년 10월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ADMM-Plus)’에 참석한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은 ‘인도·태평양’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며, 미국이 여전히 인도·태평양을 핵심 전략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비록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독자적인 인도·태평양 전략 문서가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이는 상위 전략 문서들 내에서 우선순위가 조정된 결과이지, 인도·태평양에 대한 전략적 의지 자체가 소멸하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트럼프 1기 행정부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2007년 출범 이후 1년 만에 사실상 중단되었던 ‘쿼드(Quad, 미국·일본·호주·인도 안보협력)를 2017년 부활시키며 인도·태평양 시대의 본격적 도래를 선언하였다. 이어 바이든 행정부가 인도·태평양 전략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면서, 동맹국 및 안보 우호국들을 겹겹이 연결하는 ‘격자형(lattice-type)’ 안보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25년 1월 21일에 개최된 쿼드 외교장관회의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FOIP)’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고, 유사 입장국 간 해양·경제·기술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하였다. 6개월 후인 7월 1일 개최된 쿼드 외교장관회의 역시 이러한 기조를 재확인하였다. 또한 2025년 2월 10일 개최된 미·일 정상회담은 쿼드를 비롯해 한·미·일, 미·일·호주, 미·일·필리핀 등 다층적 소다자 협력 메커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록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과 이에 대응한 미국의 50% 상호관세 부과로 미·인도 관계가 악화되면서 2025년 말 인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쿼드 정상회의가 취소되었지만, 쿼드는 첨단기술, 사이버, 핵심광물, 해양안보, 물류 등 비전통안보 분야를 중심으로 여전히 가동되고 있다. 한편 전통안보 영역에서는 서태평양 제1도련선에서 중국 억제를 목표으로 하는 이른바 ‘스쿼드(S-Quad, 미·일·호주·필리핀 안보협력)’가 점차 제도화의 틀을 갖추어가고 있다.

 

2025년에 미국이 공개한 「잠정 국방전략지침(Interim National Security Strategic Guidance)」, 「국방전략(National Defense Strategy)」 초안, 그리고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NSS)」은 모두 인도·태평양을 미국의 핵심 전략 지역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중국에 대한 억제를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최우선 과제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하영선 2026).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표현처럼 동맹국들로부터 과도한 부담을 ‘강탈당하지’ 않고 당면한 중국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저비용·고효율로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관리할 수 있는 안보네트워크를 유지·강화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관이나 자국 우선주의와 배치되는 선택은 아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안보네트워크는 구성국 간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고 특정 사안에 대한 공동 대응을 조율하는 데 효과적일 뿐 아니라, ‘운영 시스템’으로서의 규칙과 규범을 비교적 효율적으로 확산시키고 이행 여부를 다각적으로 점검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종합하면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주도의 안보네트워크를 매개로 한 ‘연합 패권(coalitional hegemony)’을 추구할 가능성이 크다 (Loke and Emmers 2025). 이에 따라 2026년을 향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핵심 변수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를 어떻게 유지·관리할 것인지, 그리고 이에 대해 중국과 역내 국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지가 될 것이다.

 

II. 2026년 인도·태평양 전략 환경

 

1.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의 지속과 조정

 

미국이 여전히 패권국인지, G2의 일원인지, 혹은 세계질서가 G0 또는 G- 상태로 이행하고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국제정치학계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군사력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아직 세계 유일의 ‘하이퍼 파워(hyper power)’라는 점을 부정하는 견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태국-캄보디아 전쟁을 포함해 진행 중이던 다수의 분쟁을 자신이 중단시켰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과장된 자화자찬의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미국의 압도적 패권적 지위를 방증하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전쟁부) 장관이 2025년 12월 6일 개최된 ‘레이건 국방 포럼’ 연설에서 미국의 단극 체계는 끝났다고 발언했지만, 이는 동맹국의 역할 증대를 강조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다만 문제는 미국 패권의 ‘성격 변화’이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공재를 제공하는 ‘선의의 패권국(benign hegemon)’이었다면, 트럼프 2기 행정부 하의 미국은 ‘악의적 패권국(malign hegemon)’의 모습을 보인다.

 

미국은 자국이 주도해 구축한 자유주의 다자 무역 질서의 근간을 흔들면서, 세계 각국을 상대로 양자 협상을 통해 이른바 ‘상호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기반해 실질적인 강제력을 수반한다. 일례로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대중(對中) 압박 정책의 반사이익을 누렸던 베트남에 대해서는 중국산 제품의 우회 수출 통로가 되고 있다는 이유로 2025년 4월 2일 46%의 상호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베트남이 대미 무역흑자 축소와 중국산 제품의 우회 수출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하자, 미국은 7월 2일 관세율을 20%로 인하하였다. 10월 아세안 정상회의 계기로 진행된 관련 협상에서도 미국은 아세안 국가 일부에게 무관세 적용 범위를 확대해 준 반면, 캄보디아·태국·말레이시아에 19%, 베트남에 20%의 상호관세를 유지하였다. 인도의 경우, 인도의 러시아 원유 수입을 문제 삼으며 50%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통상 압박과 함께 동맹국을 상대로 국방비 증액 요구도 강화하고 있다. 집권 초부터 나토 동맹국, 일본, 한국, 호주에게 국방비를 GDP의 5%까지 증액하라고 압박하고 있는데, 나토의 기준으로 볼 때 5% 중 3.5%는 직접적인 군사비용, 1.5%는 간접적인 안보 비용이다. 2025년 5월 30일 샹그릴라 안보대화를 계기로 개최된 미·호주 국방장관 회담에서 미국 헤그세스 장관이 호주 리차드 말스 장관에게 국방비를 GDP 대비 3.5%까지 신속히 올리라고 요구하자,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국방 정책은 우리가 결정할 것”이라며 공개 반발하였다. 한국은 2025년 10월 30일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핵심 군사비를 GDP 대비 3.5% 수준까지 증액하겠다고 약속했다. 2025년 12월에 발표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NSS는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세계를 떠받들던 시기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동맹국들의 국방비 분담 증액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전통적 동맹국들을 ‘무임승차 국가’로 비난하는 반면, 러시아나 북한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미국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민주주의 및 가치 외교의 신뢰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보이다.

 

아울러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국가 자본주의적 성향을 강화하며 미국 대기업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2025년 초 미국과 베트남의 관세 협상 국면에서 베트남이 미루어왔던 미국 첨단기술 기업 스타링크(Starlink)의 베트남 사업권을 승인하기로 한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미국은 2025년 7월 ‘미국의 AI 행동 계획(America's AI Action Plan)’을 발표하며 미국의 AI 제품과 플랫폼을 동맹 및 안보 우호국에 수출해 글로벌 표준과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패권적 의지를 분명히 했다. 과거 화웨이 사태가 중국 기술의 사용을 차단하는 데 초점을 둔 배제 전략이었다면, 최근 미국의 접근은 자국 기업의 기술과 제품 사용을 요구하는 보다 적극적인 기술 패권 전략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구축해 온 안보네트워크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은 냉전기에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태국과의 동맹을 중심으로 이른바 ‘중심축과 바큇살(hub and spoke)‘ 동맹 체제를 운영했고, 탈냉전기에는 동맹을 상호 연결하고 인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안보 파트너를 포함하는 다층적·복합적 안보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런데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는 미국의 ‘중심성(centrality)’을 담보하지 않는다. 냉전기 미국이 주도한 ‘중심축과 바큇살’ 동맹 체제에서는 미국과 동맹국 간의 비대칭적 권력 관계로 인해 미국의 중심적 지위가 자연스럽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의 ‘원칙 있는 안보 네트워크’와 바이든 행정부의 ‘격자형 안보 네트워크’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네트워크 참여국은 확대되었고, 중국에 대한 위협 인식과 가치 공유의 수준은 점차 분산·이질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기존 질서 유지와 안보 공약을 위해 제공해 온 경제적·군사적 공공재의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보호무역 정책, 이를 이어받은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법(CHIPS)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그리고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상호관세 정책은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의 바탕이 되었던 법의 지배, 자유무역, 민주주의와 같은 ‘자유주의 국제질서(International Liberal Order)‘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인도·태평양 지역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는 비교적 높은 내구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네트워크상의 중심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연결 중심성(Degree Centrality)’과 ‘근접 중심성(Closeness Centrality)’에만 의존하지 않고, ‘매개 중심성(Betweenness Centrality)’과 ‘고유벡터 중심성(Eigenvector Centrality)’까지 함께 증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Park 2023). 첫째, 미국은 ’연결 중심성‘ 측면에서 기존 동맹국뿐 아니라 과거 적대 관계에 있었거나 비동맹 성향을 지닌 국가들까지 적극적으로 네트워크에 편입시켜 왔다. 베트남과의 관계 정상화와 항공모함 기항, 인도네시아와의 포괄적 안보 파트너십 체결, 파푸아뉴기니와의 방위협정은 미국의 전략적 접근을 명확히 보여준다. 미국은 안보네트워크의 외연 확장을 통해 남중국해와 남태평양을 아우르는 접근성과 중국 견제 역량을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둘째, ’근접 중심성‘ 측면에서는 기능별 협력체를 중첩적으로 연결해 소지역과 의제 간 ‘거리’를 단축시키고 있다. 해양영역 인식, 해저케이블, 팬데믹 대응, 물류 통합 등 쿼드(플러스)의 기능주의 협력은 네트워크의 밀도를 높이는 동시에 미국의 의제 설정 능력을 강화한다. 이와 더불어 2025년 일본과 필리핀에서 제기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단일 ‘전역(theater)’으로 묶으려는 논의 역시 전통 안보 영역을 넘어 기능적 협력의 결속도를 높이는 흐름과 연계되어 있다.

 

미국은 동맹국의 역할을 증대하고 미국의 부담을 축소하기 위해 ‘매개 중심성‘과 ‘고유벡터 중심성’을 높이고 있다. 셋째, ‘매개 중심성‘ 차원에서는 미국은 광범위하고 이질적인 인도·태평양 공간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소지역 허브’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일례로 트럼프 1기 행정부 시 부활한 쿼드는 일본, 호주, 인도를 각각 동북아, 남태평양, 인도양의 핵심 거점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넷째, ‘고유벡터 중심성’ 차원에서 미국은 일본, 호주, 인도와 같은 소지역 허브 국가를 적극적으로 지원·육성함으로써 간접적 영향력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일본의 역내·외 안보 역할 확대와 한·일 관계 정상화, 호주의 남태평양 리더십 강화, 그리고 나토와 인도·태평양 4개국(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IP4) 간 연계를 촉진하고 있다.

 

중심성’ 강화 측면에서 2026년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네트워크를 운영하는 데 있어 주목할 것은 앞서 언급한 ‘스쿼드’이다. 2025년 내내 인도의 러시아산 석유 구매 등으로 미국과 인도의 관계가 소원해진 상황에서, 미국은 쿼드를 비전통안보 중심의 ‘쿼드+’로 운영하는 한편, 인도가 제외되고 필리핀이 포함된 ‘스쿼드’를 보다 전면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스쿼드는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비전통안보를 넘어 전통안보 영역까지 협력을 확대한 소다자 안보협력체이다. 2024년 이후 4개국 간 다양한 조합의 양자·3자·4자 군사훈련과 공동 해양 순찰이 지속해서 확대되고 있다. 2024년 4월 개최된 미·일·필리핀 3국 정상회담과 같은 해 7월 체결된 일본·필리핀 상호접근협정은 이러한 흐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미국은 2025년 1월 USAID 자금 동결을 골자로 한 행정명령을 발동하면서도 일부 예외를 설정했는데, 필리핀군 현대화 지원 예산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나아가 필리핀을 중심으로 일본과 호주뿐 아니라 영국·캐나다·프랑스 등 나토 주요국과의 군사·안보 협력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동북아시아의 일본, 남태평양의 호주, 인도양의 인도에 더해 동남아시아에서도 전략적 거점 국가를 확보했음을 시사한다. 미국은 2024년 필리핀과의 연합훈련을 위해 일시적으로 배치했던 중거리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았으며, 2025년에는 오히려 추가 배치하였다. 동남아 거점으로서 필리핀의 안보 역할 확대와 ‘스쿼드 (+)’는 미국이 ‘매개 중심성’과 ‘고유벡터 중심성’을 동시에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2. 중국의 세력권 확장: 미·중 제도·규범 경쟁 심화

 

인도·태평양 국제관계 질서는 단순히 ‘군사력(power)’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Kai He와 Huiyun Feng에 따르면 국제질서는 군사력뿐 아니라 제도(institution)와 규범(norm)에도 영향을 받는다 (He and Feng 2023). 제도의 측면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에는 크게 세 가지 축이 존재한다. 첫째는 유엔(UN)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국제질서, 둘째는 아세안 중심 제도(ASEAN-led institutions), 셋째는 미국이 주도해 온 인도·태평양 안보네트워크이다. 그러나 세 가지 모두 구조적 제약에 직면해 있다. 유엔 질서는 미국 스스로가 이를 훼손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규범적 권위와 실효성이 약화하고 있다. 아세안 중심 제도는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과 합의제(consensus building)를 핵심 원리로 삼고 있는데, 그 자체가 의사결정의 속도와 효율성을 제약한다.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는 동맹과 소다자 안보협력이 격자형으로 중첩되는 구조이지만, 아직 포괄적인 제도의 기제를 구비하고 있지는 못하다. 기존 제도의 결함 속에서 중국은 상하이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sation, SCO), 러시아·인도·중국(RIC) 협력,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협의체(BRICS),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 (Conference on Interaction and Confidence Building Measures in Asia: CICA) 등 이른바 ‘중국식 다자주의’ 협의체를 통해 제도의 차원에서 세력권을 점진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즉, 유엔, 아세안, 미국 주도의 제도가 흔들리는 틈을 활용해 ‘글로벌 거버넌스 이니시어티브(GGI)‘를 제시하며 대안적 다자 제도를 구축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동률 2026).

 

BRICS의 경우, 2024년 말 태국과 말레이시아가 BRICS 파트너국이 되었고, 2025년 1월에는 인도네시아가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이어진 2025년 6월 베트남의 파트너국 합류, 10월 아세안 정상회의에 브라질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의 참석은 아세안 국가들 사이에서 BRICS에 대한 관심과 관여 가능성이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2025년 5월에는 아세안–걸프협력회의(GCC)–중국 3자 정상회의가 최초로 개최되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내 이슬람 국가들이 중동 국가들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가운데, 중국은 이 틀을 활용해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하였다. 더 나아가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SCO가 장기적으로 동남아까지 확장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동남아 국가 중 SCO 회원국은 없지만, 경제적 연계 강화, 에너지·시장 접근, 중앙아시아 진출이라는 잠재적 이익을 고려할 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또한 중국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대비되게 역내 다자 무역 협력을 확대하였다. 2025년 10월 아세안 주도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아세안은 ‘중국–아세안 FTA 3.0’ 확대 개정안에 합의했다. 2020년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RCEP)’ 체결 이후 처음으로 RCEP 정상회의도 개최되었다. 미국이 다자 무역 질서에서 이탈하는 가운데 중국이 역내 경제 질서에서 제도적 중심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2025년 10월 아세안 정상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아세안–중국 회담에서 중국 리창 총리가 보호무역주의와 일방주의를 비판하며 미국을 간접적으로 겨냥한 발언을 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보호무역 정책은 역설적으로 중국이 다양한 (소)다자 협력을 촉진하며 역내 세력 확장을 도모할 수 있는 전략적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규범(norm), 즉 가치와 정체성의 측면에서도 중국의 세력권 확대 추세는 뚜렷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 하의 미국은 더 이상 자유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선의의 패권국(benign hegemon)’으로 인식되기 어렵고, 오히려 ‘악의적 패권국(malign hegemon)’의 성격을 띠고 있다. 미국이 동맹국 및 안보 우호국들과 공유해 왔던 ‘우리(we)’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발생하고 있다. 다만 미국은 중국의 권위주의적 통치, 인권 문제, 규범 위반 행태를 부각하며 ‘타자(thou)’의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우리(we)’ 정체성의 손실을 일정 부분 보완하려 한다 (Park 2025). 반면 중국은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2024년 12월 17일 중국 외교부 산하 국제문제연구소가 주최한 심포지엄 연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발’을 다자협력의 핵심 기치로 내세우며 다자 영역에서 중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와 협력을 강화하며,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는 기회를 포착하여 중국이 세계 무대 중심으로 부상하겠다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 인도·태평양 전략의 구조적 약점 중 하나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 대한 체계적인 지경학적 대응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개별 인프라 투자와 일본, 호주, 인도와의 양자·삼자·쿼드 협력을 통해 일대일로에 대응해 왔으나, 중국의 압도적인 자본 규모에 비해 제한적 성과에 그쳤다. 제도와 규범을 통한 중국의 세력권 확산 의도는 2025년 초 미국이 USAID 자금 동결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던 다수의 개발협력 사업이 중단 위기에 처하자 중국은 이를 전략적 기회로 활용해 역내 다자 영역에서 미국 영향력을 약화하고 자국의 공간을 확대하려 했다. 실제로 시진핑 주석은 2025년 4월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잇달아 방문하며 ‘미국 영향력 축소’ 국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외교 행보를 보였다. 시진핑 주석은 2026년 신년사에서 ‘각국과 손을 맞잡고 세계 평화 발전을 촉진하며 인류 운명공동체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발언했다.

 

중국의 매력공세가 지속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2025년 10월 개최된 아세안 주도 정상회의에 참석할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1기 첫해를 제외하고는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에 지속해서 불참했었기 때문에, 2기에서도 유사한 행보를 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발생한 8개의 전쟁을 중단시켰다고 자평해 온 트럼프 대통령에게 캄보디아와 태국 간 휴전 협정식은 자신의 외교적 성과를 과시하기에 적합한 무대였다. 휴전 협정식 참석을 위해 2025년 10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아세안 정상회의(아세안+1)에는 참석했으나, 역내 주요 국가들이 참여해 지역 질서 전반을 논의하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는 불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적 참여는 미국의 아세안 관여가 규범과 제도를 함께 형성하는 다자주의적 접근이라기보다는 단기적 성과와 거래를 중시하는 도구적 접근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자국을 ‘다자주의의 수호자’로 차별화하면서 제도적·규범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3. 미·중 경쟁과 동남아, 남태평양, 인도양: 역내 중견국 네트워크 확장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 간 지정학·지경학적 경쟁이 한층 심화하는 가운데, 동남아시아는 미·중 세력권 경쟁이 가장 첨예하게 전개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 아세안이 공식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원국들의 미국 또는 중국으로의 경도 현상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필리핀은 ‘스쿼드’를 통해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2025년 4월 레암 해군기지를 개장한 캄보디아는 중국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인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등 주요 동남아 국가들을 자국 주도 안보 네트워크로 유인하기 위해 해양안보 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정부 안전보장 능력강화 지원(OSA)’을 통해 정보·감시·정찰(ISR) 장비 제공 등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2025년 11월 개최된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ADMM-Plus)’에서 미국은 무인기 기반의 공동 해양 감시체계 구축을 제안하였다.

 

지경학적 차원에서는 중국이 일대일로 구상을 통해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개발원조를 지속하며 역내 국가들을 자국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한 중국에 맞서 미국은 2025년 10월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등 동남아 4개국과 핵심 광물 및 희토류 협정을 체결하였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와의 무역협정에는 ‘미국의 핵심 이익이나 안보를 위협하는 경쟁 협정을 체결하면 협정을 종료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중국을 염두에 둔 미국의 비대칭적이고 조건부적인 지경학 전략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아세안이 단일한 집단 행위자로서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에는 내부 분화와 이해관계의 이질성이라는 구조적 제약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2025년에도 미얀마 군정 승인 문제를 둘러싼 아세안 내부 논의가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태국과 캄보디아 간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5월 26일 양국의 국경분쟁 지역에서 교전이 발생해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했고, 군사적 긴장은 7월 24일부터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7월 29일 휴전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지속되었으며, 결국 미국과 아세안 의장국 말레이시아의 중재로 10월 ‘쿠알라룸푸르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럼에도 11월 12일 교전이 재발했고, 12월 7일 대규모 충돌 이후 12월 27일에야 새로운 휴전이 합의되었다. 미얀마 군정 승인 문제와 태국–캄보디아 국경분쟁은 아세안의 내부 응집력이 약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아세안이 강조해 온 ‘아세안 중심성’과 ‘아세안 컨센서스’ 원칙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그 결과 다수의 동남아 국가들은 아세안 차원의 포괄적 합의가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는 ‘아세안 방식’을 고수하기보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소수 국가 중심의 소다자 협력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세안 중심성과 컨센서스를 부정하기보다는, 신속하고 실질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사안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유연한 협력 방식을 병행하려는 것이다.

 

한편 남태평양 호주에서는 2025년 5월 3일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연장했다. 전통적으로 노동당 정부는 자유당 정부보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무역분쟁으로 악화하였던 호주와 중국의 관계가 정상화될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평가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남중국해 및 남태평양 공세가 지속되면서 호주 내 중국 위협 인식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2025년 2월 중국 해군의 태즈먼해 실사격 훈련으로 민간 항공기가 항로를 변경해야 했고, 10월에는 중국 전투기가 남중국해에서 호주 해상초계기 인근에 조명탄을 발사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비록 2024년과 2025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호주와 중국 간 무역 관계는 표면적으로 정상화된 것으로 보이지만, 호주에서는 중국이 대체 광물 공급처를 확보할 경우 경제적 강압을 재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에 따라 호주는 2025년에도 광물 공급망 다변화를 핵심 정책 과제로 설정하고, 쿼드 차원의 ‘핵심 광물 이니셔티브’와 미·호 간 ‘핵심 광물 공급망 프레임워크’를 체결했다. 안보 측면에서도 호주는 ‘탤리즈만 세이버(Talisman Sabre)’와 같은 대규모 연합훈련을 통해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의 남방 축 역할을 지속하는 한편, 필리핀을 중심으로 한 스쿼드 협력과 동남아 해양안보 역량 강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25년 한 해 동안 호주에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바이든 행정부 시절 출범한 ‘오커스(미·영·호주 안보협력, AUKUS)를 계승할지가 핵심 관심사였다. 미국 해군의 잠수함 전력 감소 전망 속에서 미국에서 오커스 후퇴 가능성이 제기되자 호주와 영국이 우려를 표명했으나, 6월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미·영 정상회담과 10월 미·호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오커스 지속과 원자력 잠수함 제공 일정을 확인했다. 이어 12월 미·호주 장관급 ‘2+2’ 회의에서도 오커스 추진이 재확인되며 불확실성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남태평양에서 호주는 자국의 안보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세력 확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인프라 투자와 안보협력을 확대하자, 호주는 다수의 태평양 도서국과 안보 협정을 체결하고 치안·군사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 2025년에는 미국, 일본과 함께 키리바시–나우루–미크로네시아를 연결하는 대규모 해저케이블을 완공하며 사이버 안보 대응에도 나섰다. 비록 중국의 지속적인 공세로 바누아투와 나우루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대응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2025년 9월 파푸아뉴기니와 방위조약을 체결하며 남태평양에서 미국과 뉴질랜드에 이어 세 번째 동맹국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도양에서는 인도·호주·프랑스 간 삼자 안보협력의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이른바 ‘캔버라–델리–파리’ 안보협력은 2020년 프랑스의 주도로 출범했는데, 오커스 협정 체결 과정에서 호주가 프랑스와의 잠수함 계약을 파기하면서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후 2022년 호주 노동당 정부 출범과 위약금 합의를 계기로 호주–프랑스 관계가 회복되면서, 삼자 협력 역시 재가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2025년에는 1월 프랑스 주관 ‘라 페루즈(La Pérouse)’ 훈련에 인도와 호주가 참여했고, 7월에는 인도가 호주와 미국이 주관하는 ‘탤리즈만 세이버(Talisman Sabre)’ 훈련에 최초로 참여했으며, 10월에는 호주와 인도가 안보 협정을 체결하는 등 협력 재개의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졌다. 같은 달 23일에는 제77차 유엔총회를 계기로 3국 외교장관이 미국 뉴욕에서 회동해 해양 안보 현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프랑스령 레위니옹, 호주의 코코스 제도, 인도의 안다만·니코바르 제도를 잇는 인도양의 전략적 중요성이 재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디에고 가르시아를 매개로 한 미국·영국과의 연계 가능성까지 시사한다.

 

호주와 인도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역내·외 국가들과의 양자 및 소다자 협력을 눈에 띄게 늘이고 있다. 예컨대 호주는 2025년 8월 일본에 약 9조 원 규모의 차세대 구축함 11척을 발주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호주와 인도가 안보협정을 체결했다. 소다자 차원에서도 호주·한국·일본이 참여한 제3차 인도·태평양 대화가 2025년 10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고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가운데 미국의 동맹국과 안보 우호국이 역내 국가 중심의 전략적 연합을 중시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에는 유럽의 주요 국가들도 동참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나토–IP4 연계가 미국의 직접적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유럽과 인도·태평양을 연결하는 협력 플랫폼으로 부상하고 있다. 2025년 11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호주·인도·캐나다는 신기술 분야 협력을 강화하는 3국 파트너십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호주와 인도의 관점에서 일본·한국·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인도·태평양 지역 주요 거점 국가와의 협력은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를 보완·강화하는 동시에, 역내 국가 주도의 소다자 협력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미국 주도 네트워크의 핵심 노드로 기능하는 호주·인도·일본·한국·필리핀 등이 연대를 통해 네트워크 내 위상을 공고히 하면서 자율성을 확대해 나갈 경우, 해당 네트워크가 과도하게 미·중 대립의 도구로 기능하는 것을 방지하게 된다.

 

III. 우리의 전략적 고려사항

 

미·중 경쟁의 전개 양상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군사력, 제도, 규범을 둘러싼 질서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한국의 대외 전략 전반에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한국은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 내 위상 강화, 중국을 고려한 전략적 신중성, 역내 중견국 및 유럽과의 안보협력 확대라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복합적인 전략적 판단을 요구받고 있다.

 

미국이 아직 군사적 측면에서 세계 유일의 ‘하이퍼 파워(hyper power)’라는 점에서, 한국이 미국 주도 안보 네트워크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필요성은 분명하다. 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특수성으로 인해 한국은 한반도 밖 안보 의제에 대한 관여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국 억제 정책이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동맹국인 한국 역시 인도·태평양 주요 안보 이슈에서 일정 수준의 기여를 요구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서태평양 제1도련선을 따라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이 심화하는 환경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만과 서필리핀해를 중심으로 양 진영의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필리핀이 수행하는 해양 순찰과 훈련에 일본, 호주, 일부 나토 국가들이 가세하는 ‘스커드(+)’ 구도가 구체화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공세적 회색지대 전략의 수위를 지속해서 높이고 있다. 2026년 아세안 의장국인 필리핀은 스쿼드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아세안 의장국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해 ‘남중국해 행동규범‘의 조속한 체결을 촉구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과제는 미국·일본 주도의 해양 안보협력에 대해 참여의 범위와 정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있다. 2025년 초 필리핀이 한국의 스쿼드 참여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언론 보도는 이러한 문제가 실제 정책 논의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라카 해협 순찰이나 술루–술라웨시 해 순찰과 같은 기존의 역내 해양 안보협력 틀에 대한 참여 요청이 있을 때도 한국은 단순한 참여 여부를 넘어 전략적 효과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해양 안보 관여는 참여 자체보다 참여의 범위와 방식이 핵심 쟁점이 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최근 한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군사훈련 참여 확대는 한국이 ‘글로벌 책임 국가’이자 ‘G7+ 국가’를 지향하며 한반도를 넘어 역내 안보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호주와의 안보협력 강화는 이러한 방향에 부합한다. 한국은 2021년 이후 호주와 미국이 주관하는 ‘탤리즈만 세이버’ 훈련에 지속해서 참여해 왔으며, 2023년과 2025년에는 한국이 수출한 K-9 자주포의 실사격 훈련을 호주 영토에서 실시했다. 동 훈련은 방산 협력을 매개로 상호 신뢰를 높이는 동시에 한국군의 실질적인 훈련 여건을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국이 참여하는 양자 및 다자 군사훈련의 수가 증가하고 규모가 확대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역내 국가들과 체결해 온 ‘상호접근협정(Reciprocal Access Agreement, RAA)‘은 한국에도 중요한 참고 사례이다. 한국 역시 호주나 필리핀 등과의 RAA 체결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쿼드가 인도·태평양 지역 ‘해양상황인식(Maritime Domain Awareness, MDA)‘ 체제의 확장을 추진할 경우 한국의 참여 여부는 또 하나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 2022년 제3차 쿼드 정상회의에서 ‘인도·태평양 해양상황인식 파트너쉽 (Indo·Pacific MDA, IPMDA)‘ 발족이 합의되었고, 2024년 9월 정상회의에서는 본격적인 추진 방안이 논의되었으며, 2025년 7월 외교장관회의에서도 관련 기조가 재확인되었다. 한국은 정보·감시·정찰과 해양 안보협력 역량을 바탕으로, 참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 공유 확대와 협력 네트워크 편입의 이점과 대중국 관계에 미칠 영향, 추가적 역할 부담이라는 비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판단의 기준은 개별 사안의 득실을 넘어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 내에서 한국의 위상을 강화한다는 전략 목표와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역내 국가를 대상으로 한 ‘해양 능력 배양(Maritime Capacity Building)‘ 역시 개별적 기여에만 머무르지 않고 쿼드 국가 및 나토 주요국과의 협력과 조율을 보다 체계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해양 능력 배양은 역내 국가의 비전통 안보 수요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정당성이 크며, 동시에 미·중 전략 경쟁이 첨예한 지역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중국의 해군력 팽창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 선박의 ‘유지·보수·운영(Maintenance, Repair, Operation, MRO)‘을 둘러싼 전략적 협력의 중요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첨단 조선 역량을 보유한 한국은 일본·호주·인도와의 경쟁 구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공동 컨소시엄과 같은 협력 방식을 통해 전략적 시너지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과 미국은 수빅만을 미 해군의 유지·보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설 확장을 추진하고 있으며, 2025년 7월에는 미국이 남중국해 인근에 선박 정비·유지보수 시설을 건설할 계획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2025년 4분기부터 HD현대가 수빅만 조선소를 재가동한 사례는 미국 사모자본, 한국의 기술, 필리핀의 노동력이 결합한 협력 모델로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은 역내 국가와의 선박 건조 및 MRO 협력을 경제적 이익의 차원을 넘어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미국 주도 안보네트워크 내에서 한국의 위상을 제고하는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일본·호주·인도와의 경쟁을 최소화하고 역할 분담에 기초한 협력 구조를 모색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2025년 7월 HD현대와 인도 코친조선소가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과 12월 호주 정부가 한화그룹의 호주 오스탈 지분 19.9% 인수를 승인한 것은 협력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사례다.

 

한편 한국은 궁극적으로 미국과 중국이 형성해 가는 인도·태평양 질서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질서 수용자(order-taker)’에 머무르기보다, 질서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질서 형성자(order-shaper)’의 역할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질서 형성자’ 정체성은 한국이 한반도 전략과 지역 전략, 세계 전략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추진하기 위한 핵심 비전이다. 전임 윤석열 정부는 한국을 ‘글로벌 중추국가(GPS)’로 설정하고, GPS 역할을 위한 아홉 가지 중점 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아직 이재명 정부의 구체적인 지역 전략은 공표되지 않았으나, 향후 한국은 ‘질서 형성자’로서의 한국의 역할을 더욱 명확히 정립해 나가야 한다. 동시에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협력 의제를 지속적으로 발굴·추진하되, 역내에서 가시성과 전략적 효과를 함께 확보할 수 있도록 해양 안보 관련 의제를 우선해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역내 국가가 지역 질서 유지에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견국 이상의 국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자국이 속한 소지역에서 지도적 위상을 확보하고, 소지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에서 핵심적인 연결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동북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동남아), 호주(남태평양), 인도(인도양)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단일 중견국이 역내 안보 질서의 구축과 유지를 주도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지만, 이들 국가가 소다자 연합을 형성하면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일정 수준의 전략적 레버리지를 확보하는 것은 가능하다.

 

한국은 인도·태평양 주요 중견국들과의 양자 및 소다자 협력을 보다 체계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2023년 한·일 안보협력 복원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은 호주와 함께 동북아를 넘어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에서도 소다자 협력을 모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한국·일본·호주·아세안 또는 한국·일본·호주·태평양도서국과 같은 조합의 협력도 현실적인 선택지가 되고 있다. 한국과 호주가 동남아시아에서 추진해 온 공동 개발협력 경험은 남태평양에서도 협력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정례적으로 개최되어 온 한·호 아세안 정책 대화를 토대로, ‘한·아세안 연대구상’에 상응하는 ‘한·호주 남태평양 연대구상’을 제안함으로써 지역 연계 외교를 제도화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해외개발원조(ODA) 예산 축소는 한국이 전략적이고 매력적인 ODA 외교를 통해 소프트 파워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전임 정부가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에서 ODA 확대를 예고하며 높아진 기대를 감안할 때, 현 정부가 현상 유지나 축소를 선택할 경우 기회를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한국은 역내 국가들이 주도하는 자생적 소다자 안보협력을 촉진하거나 기존 협력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중국 또한 참여할 수 있는 협력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교량 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아울러 미국 주도 안보 네트워크 내에서의 위상 제고와 조화를 이루는 범위에서, 중국이 주도하는 ‘중국식 다자주의’ 협력에도 선택적으로 참여하는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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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적_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및 언더우드국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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