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 세계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
강대국들의 패권경쟁과 무력 선호,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 그리고 권위주의 부상, 국제기구 무력화….
오늘을 읽는 키워드지만, 100년 전에도 유효한 키워드였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며 낯설어진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시선을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100년간의 평화’ 막바지였던 1차 세계대전 직전,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 시기와의 비교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은 “(양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짓눌렀던 개전(開戰)의 공포를 우리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투자계의 스티브 잡스로 물리는 레이 달리오는 “1945년 형성된 새 질서가 진화해 1929~1939년 당시와 유사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봤다. 미 국방부전략기획담당 특별보좌관 출신의 할 브랜즈도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1930년대와 훨씬 더 닮았다”고 했다.
과연 어느 정도로 유사한 것인가. 역사의 반복(repeat)인가, 비슷한 변주(rhyme)인가. 중앙SUNDAY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4일부터 공동기획 ‘1·2차 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을 통해 이 논쟁을 다룬다. ‘100년간의 평화’와 전간기가 왜 비극적으로 귀결됐는지, 오늘날 그 경로를 차단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색이기도 하다. 12명의 전문가가 상호의존부터 패권 경쟁, 극단주의까지 12주제를 탐색한다.
고정애 기자

1936년 3월 7일 독일 보병들이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로 행진하고 있다.
히틀러의 라인란트 도발에도 프랑스가 곧바로 군사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서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던 동맹 체제가 와해, 2차 대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사진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1936년 3월 7일 토요일 아침, 독일군 2만2000명이 라인강을 건너 라인란트로 들어갔다. 프랑스와 맞닿은 독일 서부 지역으로, 1차 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에 따라 이곳에 군대를 둘 수 없었다. 독일이 이를 어기면 프랑스는 곧바로 군사 행동에 나설 수 있었고,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를 돕기로 약속했다.
총성은 한 발도 울리지 않았다. 위기 직후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 다른 나라 대표들은 프랑스 대표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스로를 지키지 않은 프랑스가 우리를 지키러 올 거라고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프랑스가 움직이지 않은 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당장 쓸 수 있는 군대가 없었다. 그러나 동맹국들의 눈에 그것은 의지의 문제로 보였다. 프랑스에 대한 의구심은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던 동맹 체제를 무너뜨렸고, 2차 대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라인란트는 프랑스 안보의 방파제였다. 독일군의 서쪽 진격을 막는 완충지대였고, 동시에 프랑스가 동유럽 동맹국을 도우러 갈 수 있는 길목이었다. 프랑스는 1933년부터 독일이 이곳을 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프랑스, 독일 저지 의지 있었지만 소극 대응
그런데도 프랑스는 왜 움직이지 못했을까. 필자가 당시 프랑스 내각의 논의와 의회 청문회 기록을 추적하며 가장 충격을 받은 문장이 있다. 실제 독일군의 진격이 있기 8일 전인 2월 27일, 프랑스 내각은 이렇게 결정했다. “어떠한 단독 행동도 하지 않는다(aucune action isolee).” 영국과 함께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배경에는 영국의 미지근한 태도가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이 경찰로 위장한 병력을 라인란트에 늘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이 이 문제를 키우고 싶어 하지 않자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영국 외무장관은 영·불 협의가 독·불 국경을 지켜줄 의무까지 뜻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공 문제로 이미 프랑스와 멀어진 상태였다. 결국 영국의 동의가 프랑스 행동의 전제조건이 됐다.
3월 7일 독일군이 들어오자 영국은 관련국 회의가 열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프랑스에 요구했다. 프랑스 총리 알베르 사로(Albert Sarraut)는 응징을 원했다. 전면전이 걱정된다면 국경을 넘어온 독일군만 밀어내는 소규모 ‘경찰작전’이라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전쟁장관 루이 모랭(Louis Maurin)의 답은 “불가능하다”였다. 1차 대전의 참호전을 겪은 프랑스는 방어가 공격보다 유리하다고 믿었고, 이미 군대를 마지노선 요새 뒤에서 싸우도록 재편해 두었다. 국경을 넘어 진격할 부대가 따로 없었다. 모랭은 라인란트 진입을 위한 어떠한 형태의 군사작전이든 실행하려면 즉시 약 150만 명 규모의 동원령을 발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료들은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총동원이 미친 생각이라고 소리쳤다. 사로는 훗날 의회 청문회에서 즉각적인 행동을 위한 군사적 수단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프랑스의 소극적 대응의 결정적 이유였다고 증언했다.
영국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재무장을 마치려면 최소 3년이 필요했고, 방공망이 부실해 독일 폭격기의 보복이 두려웠다. 런던으로 건너간 프랑스 외무장관이 얻어낸 것은 국제연맹의 규탄 결의와 형식적인 영·불 군사회담뿐이었다. 그마저 작전계획을 주고받는 것은 금지됐다. 7월, 프랑스는 응징 계획을 공식적으로 접었다. 두 나라 모두 독일을 저지해야 한다는 의지는 있었다. 그러나 당장 쓸 수 있는 군사적 수단이 없었다. 두 나라는 서로에게 기댔고, 결국 서로의 발목을 잡았다.
히틀러는 이 빈틈을 정확히 읽었다. 그는 영국의 국내 사정, 전쟁을 꺼리는 프랑스 여론, 대응책을 놓고 갈라진 프랑스 군 지도부에 대한 보고를 받고 1937년으로 잡았던 라인란트 재무장 계획을 1년 앞당겼다. 진주 병력에는 전차와 폭격기를 동원하지 않기로 했다. 독일의 행동이 조약상 ‘명백한 위반’인지 논란의 여지를 남겨 이미 분열된 상대가 대응의 명분을 찾기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이다. 필자가 분석한 192건의 국제 위기에서도, 자국 영토와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의 도발에 무력 응징으로 맞선 경우는 42%에 그쳤다. 응징하고 싶어도 당장 그럴 수 없는 상황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도전하는 쪽은 바로 이런 틈을 노린다. 상대가 지금 당장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순간 위험을 무릅쓴다.
라인란트는 히틀러에게 좋은 학습 기회였다. 1937년 11월 그는 참모들에게 영국은 1936년에 움직이지 않았으니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에도 끼어들지 않을 것이고, 프랑스는 영국 없이 혼자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8년 2월에는 “그때 프랑스가 라인란트로 진군했다면 우리는 물러나야만 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물론 과장이 섞인 말이었겠지만, 1936년의 히틀러가 정복자보다 도박꾼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그해 3월 오스트리아가 병합됐고, 9월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결정됐다. 라인란트에서 도발을 막지 못한 순간이 2차 대전으로 가는 갈림길이었다.
라인란트에 독일 요새가 들어서자 프랑스는 동유럽 동맹국을 도우러 갈 길을 잃었다. 프랑스와 손잡았던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는 흔들렸다. 루마니아 외무장관은 프랑스 총리에게 3월 7일 자기 나라도 지키지 않은 프랑스가 어떻게 동맹국을 지키겠느냐고 따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이듬해 이탈리아와 협정을 맺었고, 체코슬로바키아도 독일과 타협할 길을 찾았다. 이미 흔들리던 벨기에는 1936년 10월 중립을 선언했다. 벨기에의 이탈로 요새화되지 않은 프랑스 북부 국경이 독일에 그대로 드러났고, 마지노선의 가치도 반감됐다.
동맹국들은 프랑스가 ‘못한’ 것과 ‘안 한’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안에서는 수단의 문제였지만, 밖에서는 의지의 문제로 보였다. 동맹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조약이 파기될 때가 아니다. 도전국의 군사적 도발과 기정사실화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다.
국제 위기 192건 중 적 무력 응징 42% 그쳐

1934년 뷔케부르크 수확 축제에 참석한 아돌프 히틀러.
그는 전쟁을 꺼리는 프랑스와 영국의 빈틈을 정확히 읽고 라인란트 재무장 계획을 1년 앞당겼다. [사진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미국은 더 이상 모든 곳을 홀로 지킬 수 없다. 안보 제공을 약속한 곳은 많은데 이를 수행할 힘은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이른바 ‘리프먼 갭(Lippmann gap)’ 때문이다. 2026년 미국 국가방위전략(NDS)은 이를 사실상 인정하면서 유럽과 중동, 한반도의 동맹국들에 자기 방위의 ‘일차적 책임’을 요구한다. 미국의 안보전략 변화 속에서 동맹국들이 각자 자기 지역의 방위를 더 많이 떠맡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렇다면 1936년 프랑스가 답하지 못한 질문이 다시 중요해진다. 동맹국은 혼자서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가. 유럽과 인도·태평양, 북미를 잇는 동맹 네트워크 안에서 누가 무엇을 얼마나 맡을 것인가. 프랑스의 실수는 동맹을 존중한 데 있지 않았다. 동맹이 움직이지 못할 때를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 둘지, 그 답을 평소에 마련하지 않은 데 있었다. 답을 준비하지 못한 곳은 동맹의 약한 고리가 되고, 도전하는 쪽은 1936년의 히틀러처럼 언제나 그 고리를 찾아낸다.
동맹의 신뢰는 위기의 첫 순간, 당장 꺼내 쓸 수 있는 힘에서 나온다. 동맹국 각자가 즉시 동원할 수 있는 힘은 동맹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동맹을 더욱 오래가게 하는 조건이다. “단독 행동은 없다”는 결의는 동맹국과 국제사회를 존중하는 다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동맹 체제 전체를 마비시키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90년 전 라인란트가 남긴 경고다.
ㆍ라인란트 재무장(1936)=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비무장지대로 남아 있던 독일 서부 라인란트에 히틀러가 1936년 3월 군대를 진주시킨 사건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히틀러의 대외 팽창을 막을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ㆍ리프먼 갭(Lippmann Gap)=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전후 질서 구상에 참여한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 1943년 제시한 외교정책 원칙에서 비롯된 개념. 그에 따르면 외교정책이란 국가가 부담하는 공약과 국가의 국력을 균형 있게 맞추되, 예비 국력을 충분히 남겨두는 것이다. 리프먼 갭은 대외 공약이 국력을 초과할 때 발생하는 불균형을 지칭한다. 이는 외교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해치고 국내 정치적 갈등을 키울 수 있다.
김양규 국방대 안보정책학부 교수. 서울대-플로리다인터내셔널대 출신으로 캐나다 아시아태평양재단의 인도·태평양 연구펠로우로 활동 중이다. 억지 이론, 핵전략, 미·중 전략경쟁, 인공지능(AI)의 군사적 활용, 여론과 외교정책 등 국제안보 분야를 연구한다.
[출처:중앙일보, 고정애 기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7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