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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NK 논평] 북한의 다극화 국제질서 담론의 전략적 모호성
전재성
EAI 원장; 서울대학교 교수

Editor's Note

전재성 EAI 원장(서울대 교수)은 북한이 최근 강조하는 ‘다극화’ 담론을 단순한 국제정세 진단이 아니라 체제 생존과 핵무력 강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사로 분석합니다. 저자는 북한이 강대국 중심의 질서를 거부하고 자주국가들의 연대를 표방함으로써, 반미 전선에 동참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종속을 피하려는 ‘전략적 모호성’을 띠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 원장은 이러한 북한의 담론전략이 한국 외교에 구조적 취약성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고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주권을 지키기 위한 한국만의 독자적인 국제질서 담론 정립이 시급하다고 제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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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동요와 북한의 대응 담론

 

트럼프 정부는 지난 80여 년간 유지되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미국의 국익을 제약해 왔다는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을 모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국제규범에 근본적인 도전을 가하고 있으나, 대안적 질서에 대한 명확한 비전은 충분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동시에 동맹국들과의 갈등을 불사하는 전략적 선택은 국제사회 전반에 상당한 혼란과 불확실성을 야기하고 있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기존 질서의 토대를 흔드는 미국의 이러한 행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게도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국제질서에 대한 공통의 규범과 합의가 약화될수록,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한 상이한 국제질서 담론을 경쟁적으로 제기하는 상황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탈냉전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미국 단극체제에 대한 저항 담론을 간헐적으로 제기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의 상대적 쇠퇴가 가시화되고,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되며,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국제정치적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환경 속에서 보다 본격적인 국제질서 담론을 전개하고 있다.

 

북한이 제시하는 핵심 개념은 다극화와 신냉전이다. 이미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국제질서의 다극화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 왔으며, 2020년대 전후로는 신냉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현 국제정세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보여왔다. 최근에는 이러한 다극화 논의가 더욱 빈번하고 체계적으로 등장하는 추세이다.[1]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의 다극화 담론은 단순한 수사적 차원을 넘어,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자국의 위치와 전략을 재정립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이 인식하는 다극화된 국제질서의 성격은 무엇이며, 그 담론이 가지는 정치적·전략적 의미는 어떠한가를 분석하는 것은 향후 한반도 정세와 동북아 국제정치, 나아가 글로벌 질서 변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II. 북한 국제질서 인식의 전개: 다극화와 신냉전 담론의 형성

 

북한은 최근 수년간 국제질서를 “일극 체제의 붕괴와 다극화의 도래”라는 언어로 재정의해 왔다. 노동신문과 당·국가의 공식 담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개념은 단순한 세계정세 인식의 차원을 넘어선다. 변화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북한의 외교적·군사적 노선을 정당화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고착화하기 위해 구성된 질서 담론에 가깝다.

 

이러한 인식은 북러 간에 체결된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에서 명확한 문서적 형태로 드러난다. 조약 전문에서는 패권주의적 기도와 일극 세계질서를 강요하려는 시도를 비판하면서, 국제관계에서 국제법의 우위에 기초한 다극화된 국제적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존의 미국 중심 질서에 대한 거부를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동시에, 대안적 질서의 규범적 원칙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6조에서는 “정의롭고 다극화된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이라는 표현을 통해, 다극화 담론이 국가 간 조약이라는 법적 문서를 통해 명문화되고 제도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극화는 북한 담론에서 단순한 전망이나 희망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국제질서 변동을 규정하고 이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려는 전략적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극화 개념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북한의 공식 담론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초반 북한은 국제질서를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 체제와 이에 대항하는 다극화 지향 세력 간의 대립 구도로 인식하였다. 특히 미국의 미사일방위체계 구축과 세계 지배 전략을 일극화의 핵심 사례로 지적하며,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대국 간 공조와 지역 국가들의 연대가 다극화로 이행하는 객관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다극화는 “막을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자 향후 국제전략구조의 변화를 예고하는 역사적 추세로 제시되었다.[2]

 

200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다극화 담론은 보다 구체적인 행위자와 제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중국·러시아·인도 간 협력 강화,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성장, 유럽연합의 독자적 안보 역량 추구, 발전도상국들의 집단적 연대는 모두 세계의 다극화를 실질적으로 추동하는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흐름이 미국의 독단과 전횡을 견제하고 국제관계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다극화가 공정한 국제질서와 자주화된 세계를 실현하는 핵심 경로라고 규정하였다.[3]

 

2008년 이후 다극화 담론은 국제질서 비판을 넘어 점차 대안질서론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북한은 다극화를 미국 중심 질서의 약화와 국제적 고립을 가속하는 역사적 대세로 규정하는 한편, 지역 통합과 국가 간 협조가 세계 전략구조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상하이협력기구, 브릭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연대 움직임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핵심 동력으로 제시되며, 다극화는 더 이상 전망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국제질서의 구조적 전환으로 설명되고 있다.[4]

 

다극화 담론과 함께 북한은 신냉전의 개념도 2000년대 후반부터 비교적 적극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북한은 국제사회가 냉전의 반복을 원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놓고서도 “새로운 냉전”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는 배경을 다극화 세력과 일극화 세력 사이의 갈등과 모순에서 찾았다. 특히 냉전 종식 이후 힘의 균형이 붕괴된 상황에서 미국이 강권과 전횡을 지속해 왔고 이에 대한 반발과 견제가 강화되면서 일극화 유지와 다극화 경향이 충돌하는 구조가 “새로운 냉전” 논의를 촉발한다는 논리로 정식화하였다.[5]

 

이후 북한은 동북아 차원에서 신냉전의 조성 가능성을 더욱 직접적인 군사 구도 문제로 연결했다. 미국이 일본과 남한과의 협력을 내세워 군사협력과 동맹 구조를 강화하고 장기적, 군사적 체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동북아에서 냉전 구도를 유지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미일의 삼각 군사협력을 새로운 군사 블록 형성으로 규정하면서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는 냉전의 유산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면화하였다. 이때 신냉전은 단순한 국제정세 진단이 아니라 동맹 재편과 군사 배치에 대한 경계와 대응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기능하고 있다.[6]

 

김정은 위원장은 직접 신냉전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사용하며 국제질서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최고지도자 차원에서 공식화하였다. 2021년 9월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거치며 신냉전의 용어가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여기서 국제관계 구도 변화의 핵심을 신냉전으로의 전환으로 규정하였고, 2022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제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7]

 

III. 정의되지 않은 다극세계: 북한 담론의 구조적 모호성

 

북한은 현재 신냉전의 개념보다 다극세계라는 개념을 더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 신냉전이라는 개념은 명백한 진영 대립을 상정하고, 미중 간 대결의 불가피성을 함축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다극질서의 개념을 사용하지만 미국과 적대적 대결이나 진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북한만 신냉전의 개념을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8]

 

문제는 북한이 사용하는 다극의 개념이다. 북한은 다극화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다극세계라는 개념도 빈번히 사용한다. 다극적이라는 형용사도 사용한다. 그러나 다극체제, 강대국 협조체제, 세력권 등 연관된 국제정치개념을 사용하지는 않고 있다. 다극화는 명확한 상태개념이라기보다는 일극체제의 변화라는 이행적 측면이 강한데, 과연 다극화라는 이행기 이후에 어떠한 세계가 도래할지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불명확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극화가 이루어지면 다수의 강대국 간 협조체제, 혹은 대립체제가 이루어지는 것인지, 다수의 세력권이 경합하는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극체제와 같은 다극 간 관계설정이 가능한 것인지 북한의 담론에서는 이행 이후 도래할 상태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북한이 제시하는 다극세계는 단순한 세력균형 상태가 아니라, 서방 주도의 국제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규범 질서이다. 다극화는 단순히 강대국이 늘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각국의 자주성과 주권이 실질적으로 복원되는 국제질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담론에서 다극화는 미국과 서방이 주도해 온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의 해체를 의미하며, 그 대안으로 국제법, 주권 존중, 정치적 평등에 기초한 세계질서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이때 다극화는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제국주의와 지배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이행 메커니즘으로 규정된다.

 

북한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질서는 “전 세계의 자주화”이며, 이는 모든 국가와 민족이 외부의 강요나 예속 없이 자기 방식의 발전 경로를 선택하는 탈제국주의적 국제체제를 의미한다. 북한은 이러한 다극화가 역사의 필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북한은 “제국주의자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자주화된 새 세계, 다극화된 세계질서를 수립하려는 진보적 인류의 지향과 투쟁을 절대로 거세말살할 수 없다”고 보며 “낡은 것이 멸망하고 새것이 승리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력사발전의 법칙”이라는 신념을 내보이고 있다.[9]

 

북한의 국제질서 담론은 현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부정에서 출발한다. 북한은 ‘서방 쇠퇴’와 ‘다극화 부상’을 하나의 역사 법칙으로 결합시키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전략적 선택을 정당화한다. 북한이 제시하는 다극세계는 단순한 세력 분산 상태가 아니라, 서방 중심의 일극 질서가 붕괴되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규범적 질서의 이행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서방의 제국주의 붕괴가 다극화로 이어진다는 것인데, “인류가 반제자주를 지향하는 한 공평하고 정의로운 새 세계는 반드시 건설”되며 “반제자주는 제국주의의 지배체계를 약화시키고 세계질서를 변화시키는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10]

 

여기서 다극화 개념은 국제정치이론에서 말하는 강대국 간 세력균형이나 복수의 극 국가들 간 경쟁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극화의 핵심 대립선은 미국 대 중국·러시아가 아니라, 서방 대 비서방, 더 정확히는 패권국가들 대 세계 다수의 자주국가들로 설정된다.

 

이러한 서사 속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분명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중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축을 이동시키는 신흥 강국으로, 러시아는 서방의 군사적·전략적 우위를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저항국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북한 담론에서 이들 국가가 미국과 동등한 극으로 명시적으로 설명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는 다극화의 동력이자 촉진자로 제시되지만, 막상 다극세계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중심축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설정되지는 않는다.

 

북한의 다극화 개념에는 정밀한 국력 비교나 세력배분구조에 대한 분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중국의 GDP, 러시아의 군사력, 미국의 기술력과 같은 객관적 지표에 기반한 극 구분은 북한 담론에서 주변화된다. 대신 “세계 다수”, “정의”, “역사적 흐름”, “제국주의의 쇠퇴”와 같은 도덕적 언어가 다극화를 정당화하는 주요 근거로 사용된다. 다극화는 과학적 권력 분포 분석의 결과라기보다, 서방 패권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거부의 총합으로 구성된다.

 

북한이 다극 질서를 미국·중국·러시아의 삼극 체제로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은 그중 하나의 하위 단위, 즉 중국이나 러시아의 세력권 안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 담론은 이와 같은 강대국 중심의 질서 재편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대신 북한은 다극화를 자주적 국가들의 집단적 부상으로 재정의하며,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다양한 비서방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 구조로 묘사한다.

 

물론 북한의 다극세계 개념은 중국·러시아와 일정 부분 담론을 공유한다. 세 국가 모두 서방 중심의 규범 질서, 특히 ‘규칙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위선적이고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패권의 도구로 비판한다. 그러나 중국은 다극화를 무질서가 아닌 질서 있는 관리의 문제로 파악하며, 규칙을 부정하기보다 재설계하고 제도화함으로써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기획으로 접근한다. 러시아는 다극화를 서방 규범에 대한 저항과 지정학적 힘의 재배치를 정당화하는 전략적 언어로 사용하며, 군사적 충돌과 비서방 결집을 통해 이를 현실화하려 한다. 같은 다극화라는 용어 아래서도 북한은 이념과 생존의 논리, 중국은 제도와 관리의 논리, 러시아는 힘과 충돌의 논리를 중심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 차이는 다극질서 자체의 불안정성과 복합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의 다극화 담론에는 구조적 불확실성이 내재하는데, 중국과 러시아가 명백한 극이라면, 북한의 자주 노선은 곧바로 강대국 종속의 문제와 충돌하게 된다. 북한은 다극화의 주체를 강대국들이 아니라 자주국가들의 집합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이 모순을 봉합한다. 이러한 담론 구조는 북한이 강대국 협조체제나 세력권 질서에 대해 갖는 근본적 불신과도 연결된다.

 

북한은 역사적으로 소수 강대국이 세계를 관리하는 체제를 제국주의적 담합으로 인식해 왔다. 따라서 미·중·러가 암묵적으로 세계를 나누어 관리하는 구조는, 북한의 자주 담론에서는 정당한 다극 질서로 인정될 수 없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강대국들 사이의 균형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강권 자체를 제약하는 구조다. 따라서 북한은 스스로를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니라, 제3세계·글로벌 사우스·약소국들과의 정체성 공동체에 위치시킨다. 북한은 “브릭스와 같은 다무적협력기구들이 세계의 다극화과정에 활력을 불어넣고있다”고 설명하며 “서방세계도 브릭스가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수립과 다극세계건설을 추동하는 독자적이고도 유력한 하나의 극으로 당당히 등장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중국, 러시아 등 다른 강대국의 등장을 강조하는 것과는 다른 논리이다.[11]

 

북한 담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원조를 통한 종속이라는 언어는 서방뿐 아니라 모든 강대국 일반을 겨냥하는 보편적 비판 논리로 작동한다. 이 논리는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적·군사적 영향력 확대에도 잠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잣대이며, 북한이 향후 이들 국가의 압박이나 조건부 지원을 거부할 수 있는 이론적 방패를 제공한다.

 

북한이 제기하는 다극 질서는 중국·러시아와의 전략적 공조를 정당화하면서도, 이들 국가의 강대국화를 경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중적 담론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이중성 때문에 북한의 다극화는 미래의 구체적 질서 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누가 극을 구성하는지, 극들 사이의 규칙은 무엇인지, 약소국의 자주는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되는지에 대한 답은 의도적으로 비워져 있다. 이 불확실성은 단순한 이론적 결함이 아니라, 북한이 외교적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적 모호성으로 볼 수 있다. 다극화는 북한에게 특정 강대국에 대한 유대나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압박을 무력화시키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담론적 장치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북한이 제기하는 다극세계는 표면적으로는 일관된 세계관처럼 보인다. 서방 패권의 쇠퇴, 비서방 세계의 부상, 중국, 러시아 등 반서방 강대국들의 등장, 자주국가들의 집단적 저항, 그리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이라는 서사는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를 이론적으로 분해해 보면, 그 기초를 이루는 세 개의 핵심 개념, 즉 자주, 반서방, 다극화는 완전히 결합되기보다 모순관계를 드러낸다.

 

우선 북한이 중시하는 주체, 즉 자주 노선은 본질적으로 베스트팔렌적 주권 개념에 기반한다. 모든 국가는 외부의 간섭 없이 자기 체제와 발전 방식을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는 원리다. 여기서 자주와 다극화 사이에 긴장이 발생하는데, 자주 원리는 모든 국가의 동등한 주권을 전제하지만, 다극화는 몇 개의 강대국이 구조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질서를 의미한다. 만약 다극 질서가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몇 개의 극에 의해 운영된다면, 북한과 같은 약소국의 자주는 자동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다극화의 극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주국가들의 집합으로 재정의하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주와 반서방 사이의 긴장도 뚜렷하다. 자주는 원칙적으로 중립적 개념으로 어느 나라가 미국과 동맹을 맺든, 중국과 협력하든, 그것은 해당 국가의 주권적 선택이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반서방 담론은 서방과의 협력 자체를 굴종이나 예속으로 규정하는 도덕적 판단을 포함한다. 이 순간 자주는 보편적 주권 원리가 아니라, 특정 진영 반서방 진영에 속할 때만 인정되는 조건부 가치로 변질된다. 이는 자주 개념을 북한 스스로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다극화와 반서방의 결합 역시 이론적으로 불안정하다. 다극화는 힘의 분포에 대한 분석적 개념이지만, 반서방은 역사적 책임과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다. 북한은 이 둘을 결합해 서방의 쇠퇴와 정의로운 다수의 부상이라는 서사를 만들지만, 향후 다극화가 강대국 간 경쟁과 지역 패권 다툼을 심화시킬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적 긴장은 북한이 강대국 협조체제나 세력권 질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서도 드러난다. 북한 담론은 표면적으로는 미국의 패권을 비판하지만, 그 기저에는 소수 강대국이 세계를 관리하는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미·중·러가 암묵적으로 세계를 나누어 관리하는 구조는 북한에게는 새로운 제국주의일 뿐이다. 그래서 북한은 다극화를 강대국 콘서트로 이해하지 않고, 자주국가들의 집단적 저항으로 재해석한다.

 

그러나 이 재해석은 현실의 권력 구조와 점점 괴리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제3세계·글로벌 사우스와의 일체감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모순을 봉합하기 위한 전략이다. 북한은 자신을 사회주의 진영이나 중·러 블록의 일부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온 약소국들의 역사적 연대 속에 위치시킨다.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원조를 통한 종속에 대한 비판은 서방을 겨냥한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강대국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적 잣대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가 향후 경제적·군사적 압박을 가할 경우, 자주 침해로 규정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결국 북한의 다극화 담론은 자주를 지키기 위한 방패이자, 강대국 의존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이 모순은 단순한 이론적 불일치가 아니라, 북한 외교의 구조적 딜레마다. 미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중국·러시아에 접근할수록, 그들의 강대국적 이해와 충돌할 가능성도 커진다. 다극화는 이 충돌을 미리 봉합하기 위한 담론적 장치이지만, 장기적으로 그 자체가 새로운 제약으로 전환될 수 있다.

 

IV. 북한 다극화 전략의 전개와 전망

 

북한이 최근 수년간 다극화 담론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단순한 국제정세 해석이라기보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전략적 공간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에 가깝다. 다극화는 북한에게 일관된 질서 비전이라기보다, 미국의 압박을 상대화하고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조율하는 동시에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레토릭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다극화 담론을 통해 미국 중심 단극 질서에서 핵 보유와 체제 생존이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구조를 흔들고, 핵 보유를 자주국가의 안전보장 수단으로 설정하려 한다. 비핵화를 시대착오적 요구로 규정하고 핵무력을 헌법적 지위로 고정하는 노력과도 일맥상통한다. 북한은 트럼프 정부의 미국우선주의를 비판하면서 다극화 담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현 미행정부가 미국의 배타적 리익을 절대시하는 《미국우선주의》에 기초한 일방적인 정책을 추구할수록 전세계의 다극화 흐름은 보다 가속될 것이며 이는 악의 제국 미국과 제국주의의 총파산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12]

 

동시에 다극화는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 협상 카드로 작동하여, 반서방 연대를 강조하면서도 자주와 약소국 연대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강대국 종속을 경계할 전망을 추구한다. 이러한 인식은 대미 관계에서는 장기 대결과 제한적 협상을 병행하며 핵 능력을 고도화하는 전략으로, 대중·대러 관계에서는 전략적 밀착과 구조적 경계를 동시에 유지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다극화 담론은 북한 외교에서 자주성을 방어하기 위한 이념적 자산이자, 강대국 사이에서 선택지를 넓히기 위한 실천적 도구로 기능하며, 그 자체가 북한 대외전략의 핵심적 함의이자 동시에 구조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 중요한 정책적 과제를 제기한다. 우선 한국이 변화하는 국제질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바람직한 국제질서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독자적 담론을 만드는 문제이다. 미국이 제시하는 국제질서의 미래 담론이 극심한 혼돈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국익을 지키고, 도덕적으로도 정당화가 가능하며 북한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때 효과적인 질서관이 필요하다. 미국, 혹은 서방이 제시한 핵비확산 규범과 같은 담론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이러한 현상이 다극화라는 질서담론으로 합리화된다면 한국은 핵억제전략은 물론 향후 규칙기반질서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둘째, 한국은 북한의 다극화 담론이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안정시키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강대국 의존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북·중·러 관계가 언제든지 긴장과 균열을 노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외교는 이 과정에서 주권과 지역안보, 한반도의 미래를 함께 고려하는 새로운 대화 프레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다극화 담론이 확산되는 환경 속에서 한국의 위치가 구조적으로 취약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미·중·러가 각자의 전략적 이해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재배치하려 할 경우, 북한은 자주국가로서 협상 테이블에 직접 참여하려 하지만, 한국은 강대국 간 경쟁 속에서 어려운 위치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지만 미국의 동맹 정책이 변화하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와 관계 재설정도 당면과제이다. 한국이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안정과 주권이 어떠한 규칙과 원리 위에 놓여야 하는지를 능동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대립과 단절을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 질서와 주권을 둘러싼 담론의 공간에서 설득력을 강화해야 한다. 

  

[1] Seok, Sang Hun. 2025. “Crafting a Multipolar World: Pyongyang's Evolving Narratives,” The RUSI Journal 170(3): 74–82.

[2] "세계의 다극화는 막을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다", 「노동신문」, 2000.9.5.

[3] "세계가 다극화되여가고있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추세", 「노동신문」, 2006.3.4.

[4] "세계의 다극화는 막을 수 없는 국제적 흐름", 「노동신문」, 2008.2.22.

[5] "《새로운 랭전》론이 대두하게 된 배경", 「조선중앙통신」, 2008.6.7.

[6] "《동북아시아에서 랭전구도는 제거되여야 한다》", 「조선중앙통신」, 2011.3.10.

[7] 박원곤, “북한이 그리는 신냉전의 세계,” 동아시아연구원, 「논평이슈브리핑」, 2023년 3월 9일.

[8] 이동률, “북한의 “신냉전론”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셈법“ 동아시아연구원, 「논평이슈브리핑」, 2023년 2월 27일; 장세호, ”북한의 신냉전 인식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동아시아연구원, 「논평이슈브리핑」, 2023년 3월 23일.

[9] “서방에 의해 가증되는 전쟁위험은 무엇을 새겨주는가,” 「노동신문」, 2025년 8월 24일

[10] “투철한 반제자주에 정의로운 새 세계가 있다,” 「노동신문」, 2025년 6월 8일.

[11] “더욱 높아가는 다극화의 지향,” 「노동신문」, 2025년 5월 10일.

[12] “미국의 배타적리익을 절대시하는 《미국우선주의》는 전세계의 다극화를 적극 추동하게 될 것이다.” 「노동신문」. 2025년 3월 15일.

 

■ 전재성_EAI 원장,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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