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쓰다주쿠대) 교수는 2025년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의 마감을 앞두고 북한의 지난 경제·안보적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며, 다가오는 2026년 제9차 당대회에서 제시될 새로운 외교 노선을 전망합니다. 특히 박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러시아 특수'의 변화와 트럼프 2.0 시대의 개막이라는 유동적 대외 환경 속에서, 북한이 기존의 자력갱생 기조를 넘어 '핵 기반 실리전략'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심도 있게 진단합니다. 저자는 나아가 '적대적 두 국가론'과 북미 직거래 가능성 등 한국 외교가 직면할 수 있는 구조적 고립을 경계하며, 이를 타개하고 능동적 평화공존을 모색하기 위한 '경주 이니셔티브'의 전략적 함의를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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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의 경제계획과 외교전략
북한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의 마감(2025년)과 조선로동당 제9차 당대회를 앞두고 새로운 시작(2026년)이 교차하는 시점에 서 있다. 최고 의결기구인 당대회가 비준하는 5개년 계획은 단순한 거시경제 지표의 나열이 아니다. 조선로동당이 인민에게 제시하는 통치 구상의 청사진이자, 대외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현실 진단서이다. 과거 전통적인 사회주의 당–국가 체제에서 경제 계획과 외교전략의 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경제계획은 외교전략의 방향과 수단을 규정하는 동인으로 작동하고, 외교환경의 변화는 경제계획의 수정을 강제하는 상호 규정적 성격을 띠었다. 현재 김정은 시대의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등장은 당–국가 체제의 복원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당대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했고, 이 주기에 맞추어 중장기 경제계획을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복귀시켰다. 36년간 당대회 개최를 동결시킨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주기를 5년으로 한 경제계획을 수립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북한 식 당–국가 체제가 구축된 김일성 시대의 '인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목표의 초과달성을 실현한 신화로서 기록되어 있다. 현행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그로부터 약60년 만의 부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에 대한 결산은 단순한 경제 수치의 평가를 넘어, 김정은 정권의 향후 외교 노선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제9차 당대회를 목전에 둔 2025년 하반기,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연일 “자력갱생의 기치 아래 5개년 계획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 ‘5개년’을 통해 과거의 신화까지 재현하고자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단 2025년 장마당 쌀값의 상대적 안정과 평양 및 지방의 살림집 건설 목표 초과 달성이 "위대한 승리"의 물적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마감 돌격”, “사생결단”이라는 절박한 구호가 1면에 병기되어 있기도 하다. 북한 공식 매체의 선전과 경제 현장의 현실 사이에 기묘한 인지부조화가 감지되는 지점이다. 제재와 봉쇄 속에서도 독자적인 생존 공간을 확보한 것에는 성공한 것으로 자평하고 있지만, 현실은 북한 경제의 내재적 성장 동력 회복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최근 북러 간 물동량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대비 폭증했다는 위성 데이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근거로 지난 2년간(2024~2025) 북한 경제를 지탱한 핵심 동력이 외부 수혈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국면이 북한에게 가져다 준 것은 러시아산 에너지와 식량만은 아니었다. 러시아와의 밀착은 북한에게 새로운 외교적 기회 공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 2.0 시대의 개막과 함께 종전 기류가 형성되면서 이 특수가 곧 소멸할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당장 김정은 위원장은 2026년부터 시작될 차기 경제계획의 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시간적 압박에 직면해 있다. 지난 5개년 계획은 제9차 당대회에서 어떻게 평가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어떠한 외교전략이 수립될까? 이를 검토하기 위해, 먼저 제8차 당대회 이후의 시점으로 되돌아보자.
2. 5개년 계획 이행과 외교전략의 전개
2021년 제8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2016년 제7차 당대회의 ‘5개년 전략’과는 다른 성격을 띠었다. 2016년의 ‘전략’이 대외 개방과 외자 유치를 염두에 둔 유연한 지침이었던 것에 비해, 2021년의 ‘계획’은 일종의 전시 병영식 통제 경제로의 회귀를 보여주었다.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은 독특한 최고 리더십 간의 특별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하노이 회담의 결렬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극적인 외교적 담판으로는 경제제재의 해제가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남겼을 것이다. 제8차 당대회는 ‘제재의 상수화’를 전제하면서 개최되었고, 이 전제 하에 경제 목표 설정과 자원의 배분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5개년 계획의 내용은 결국 '경제를 희생해서라도 핵무력을 완성한다'는 핵 안보 우선주의로 귀결되었다. 부족한 자원은 국방 공업에 최우선 배정되었으며, 인민 경제에 대해서는 강한 통제가 예고되었다. 대미 협상을 서두르기보다 중국·러시아를 축으로 하는 반미 블록에 편승해 장기전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미중 신냉전 구도에 편승하여 경제적 고립을 진영의 논리로 방어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경제적 참호 구축이었다. 경제 계획의 목표치는 하향 조정이 불가피했다. 성장을 통한 ‘현대화’는 유보되었고, 자력갱생을 통한 현상 유지가 사실상의 현실적 목표였다. 경제정책의 폐쇄성, 이에 동반되는 인민경제의 희생과 체제 불안은 과거의 북한 경제체제에서 익숙한 것들이다. 5개년 계획은 다시 이 잠재적 리스크를 안고 버티겠다는 의지 표명이기도 했다.
여기서 2024년 6월 체결된 북러 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은 5개년 계획의 리스크를 러시아에 아웃 소싱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일단 조약의 제4조(지체 없는 군사 원조)에서 부활된 자동 개입 조항이 재래식 전력의 열세 만회와 국방 예산 절감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었다. 나아가 제16조를 통해 일방적 강제 조치(제재)에 대한 반대와 상호 불참을 명문화했다. 서방의 대북·대러 제재에 맞서, 두 나라가 독자적인 경제 협력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당면해서는 5개년 계획의 막판 목표치(살림집 건설, 지방 공업)를 달성할 자재와 에너지 확보의 새로운 활로가 생겼다. 러시아산 식량의 유입과 북한 노동자의 파견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제재결의 제2270호는 그 동안 북한 그 자체를 사실상 불법적인 존재로 규정해 왔고, '분야별 제재'는 민생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통해 유엔 안보리 제재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거부권 동맹’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시진핑 주석의 ‘전략적 거리두기'는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존재감을 반영하기도 한다. 적어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북한은 중국에 대한 일방적 의존으로부터의 탈피를 모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이루어진 일본 기시다 내각과의 비공식 접촉 시도 또한 북한의 넓어진 활동 반경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에서는 차기 미 행정부를 향한 시그널을 발신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당선이 유력해진 2025년 하반기, 화성-19형 고각 발사와 우라늄 농축 시설 공개를 잇달아 감행한 것은 습관적인 도발이 아니었다. 북한의 핵 능력은 불가역적이며, 따라서 미국과는 비핵화가 아닌 핵군축을 위한 회담 테이블을 맞이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북한이 법제화를 예고한 ‘적대적 두 국가론’은 대미 협상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한국은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확보해 둠으로써, 향후 트럼프와의 협상 테이블을 ‘핵보유국 대 핵보유국’의 구도로 단순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협상 타결 이후 평화협정 체결 국면에서는 한국 참여 여부를 둘러싼 국제법적 해석 논쟁에 대한 선제적인 조치로서의 의미도 가진다. 여기서 남측의 당사자 원칙 주장이나 ‘중재’의 시도는 북미 직거래의 방해 요소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11월 경주APEC 회의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깜짝 만남 제안을 김정은 위원장이 거부한 것은 한국에서 개최되는 미국과의 톱 다운 쇼에 함께하지 않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제9차 당대회 이후 완성된 패키지를 들고 ‘제재 완화’라는 큰 판을 벌이겠다는 호기로도 보인다.
하지만 북한의 속내는 여유롭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과 장기화는 김정은 체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링거'와도 같았다. 따라서 2025년 11월, 트럼프의 당선과 더불어 대두된 우크라이나 종전 가능성은 역으로 북한에게 러시아 특수의 지속 가능성에 경고등이 된다. 5개년 계획 수행을 지탱하고, 새로운 외교적 공간을 만들어 주는 러시아의 특별한 역할은 소멸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북한에게 러시아와 관계가 가져다 준 특수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라는 점을 김정은 위원장이 모를 리 없다. 김정은 위원장은 2025년 중국 9.3 전승절 기념 방중을 통해 시진핑 주석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대미관계를 의식한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특별한 의전을 제공했지만, 핵무기 고도화에 대한 중국의 우려와 계산된 지지는 여전하다. 제9차 당대회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에서, 미국과의 직접 협상 환경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표1> 북한의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과 외교 및 대남전략 (202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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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기 |
5개년 계획 |
외교
및 대남 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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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2021~2023) |
[제약] 자원 차단과 통제 · 하노이 노딜 후 제재 완화 포기 · 코로나 봉쇄 및 마이너스 성장 ·
국방 부문 우선의 자원배분과 자력갱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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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 정면돌파전과 대적 투쟁 · 대미 장기전 (강대강) 및
진영 외교 · 남측의 인도적 지원 거부 및 차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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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2024~2025) |
[변수] 러시아 특수 ·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및 장기화 · 에너지·식량 확보로 목표 달성 · 제재망의 돌파로 경제활로 모색 |
[대응] 몸값 올리기와 두 국가론 · 북러 조약 체결 (리스크 아웃소싱) · 한국을 교전국으로 규정 (완전 배제) |
3. 제9차 당대회: 5개년 계획의 총화와 새로운 외교노선 전망
제9차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제8기 제13차 당전원회의가 2025년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개최되었다. 회의에서는 핵·미사일 등 국방력 증강 방향의 당위성이 강조되는 한편, 농업 증산이 중요한 과업으로 제시되었다. 제9차 당대회에서 발표될 5개년 계획에 대한 공식 총화가 이중적 평가를 담을 것임을 예견케 한다. 한편에서는 미사일 고도화와 잠수함 발사 능력 확보를 거론하며, '국방과학발전 및 무기체계개발 5개년 계획'의 조기 완수가 가장 큰 성과로 선전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인민 경제 향상, 즉 농업 및 지방 공업 발전 분야에서는 목표 미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통치 스타일의 투명성을 높인 대가로 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러한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활용 가능한 정치적 수단은 인적 쇄신이다. 제13차 당전원회의에서는 1명의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5명의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소환할 것임을 결정하고, "일부 지도간부들의 사상관점과 비활동적이고 무책임한 사업태도"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9차 당대회에서 5개년 계획의 미흡했던 결과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관리의 문제’로 치환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당대회에서 주요 경제 관료들이 대거 숙청되거나 교체되는 장면은 일어나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5년간의 자력갱생이 외부 충격 없이는 한계를 보였다는 내부적 진단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앞으로 실패한 내부 동력을 대체할 ‘대외 거래’ 중심의 노선으로 전환할 명분을 쌓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당대회 이후에도 새로운 외교 전략을 추진할 인적쇄신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새로운 외교전략을 공식화할지는 미지수이다. 제13차 당전원회의에서 현 대외 환경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인식과 대남·대미를 비롯한 대외 전략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규약 개정을 통해 북한이 대남 관련 적대적 두 국가론을 명문화할지도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점은 제9차 당대회에서도 핵전략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고수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기존의 ‘핵 우선주의’는 사실상 ‘핵 기반 실리전략’의 형태로 외교 안보 담론이 재구성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 김정은 정권은 핵을 통한 최소 억지력은 확보하면서도, 취약한 5개년 계획의 동력을 외부에서 안정적으로 확보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외교 행보는 ‘비핵화 대 보상’이라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 ‘현재의 위협 관리 대 제재 완화’라는 새로운 협상 틀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전환기적 외교전략’을 천명할 것인지는 제9차 당대회를 전후로 한 대외관계 환경의 변화여부에 달려있다.
<표2> 조선로동당 제8차 당대회와 제9차 당대회(전망) 전략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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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제8차
당대회 (2021) |
제9차
당대회 (2026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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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기조 |
고립형 자력갱생 |
핵 기반 실리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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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노선 |
통제 강화 및 내부 자원 동원 |
대외 거래 확대 및 제재 완화 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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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의 성격 |
안보 수단 (국방력 강화의 목표) |
교환 수단 (Bargaining Chip / 경제·안보 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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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 전략 |
장기전 대비 |
군축 대 제재 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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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 전략 |
원칙적 비난 및 배제 |
대미 접근의 우회로, 한미일 균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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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 전략 |
대적 투쟁 (경색 국면) |
적대적 두 국가 (완전한 배제 및 무시) |
4. 대외환경의 변화와 북한의 외교적 선택지
제9차 당대회를 예고한 13차 전원회의를 단기간에 마치고 그 내용의 공표를 자제한 데에는 북한을 둘러싼 국제 질서가 여전히 유동적이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9차 당대회의 개최에 앞선 북미 협상의 재개 여부가 불투명하다. 여기서 우크라이나 종전은 평양의 시선을 모스크바에서 워싱턴으로 선회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물론 전쟁이 종식된다 하더라도, 북러 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은 실효성을 가진다. 무기 대 에너지라는 전시의 거래는 줄어들겠지만, 러시아의 전후 복구 사업에 북한이 노동력을 파견하는 형태로 경제적 이해관계도 재조정될 수 있다. 하지만 포탄 수출만큼의 수익을 보장하지 못하며 파병을 통한 안전 보장 효과도 사라지게 된다.
북한에게 희미해지는 러시아의 존재감은 중국의 귀환을 불러온다. 러시아 특수를 중국의 지원이 대체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와 달리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일시적이지 않다. 이미 트럼프 2.0 시대의 미중 대립 격화는 북한에게 중국을 더욱 붙잡아야 할 정세를 조성해왔다. 특히 대미 협상력 강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북한에게 중국은 핵심적인 외교적 자산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중국 역시 대미 견제 차원에서 북한을 끌어안고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겠지만, 북한의 무제한적 핵 고도화를 동의하기 어렵다. 북한이 자신을 배제한 채 미국과 대타협을 이루는 것 또한 방관할 수 없다. 북한은 이 같은 중국과의 잠재적 갈등요소를 정교하게 관리하며 대미 협상력을 높여야 하는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그럼에도 김정은 위원장은 대미 접근을 포기할 수 없는 정세이다. 제2기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은 북한의 입장에서 비핵화라는 부당한 요구를 지우고 핵 군축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제시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만약 트럼프 대통령도 타협을 원한다면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또는 일부 핵물질을 폐기하거나 핵을 동결하여 관리 가능한 위협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매력적인 외교적 승리로 다가올 수 있다. 민생 관련 제재의 조건부 해제, 한미연합훈련의 잠정 중단, 그리고 북한 관광사업 투자 약속 등, 트럼프가 대가로 제시할 수 있는 당근들은 북한의 경제계획과 외교전략에 결정적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트럼프와 김정은이 합의에 이를 경우, 공식적으로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되, 실질적으로는 핵 군축 협상을 진행하는 위선적 타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핵 비확산 레짐의 균열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미 협상이 재개되는 도정에서 일본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북한에게 일본은 흔히 식민지 배상금의 지불처로 이해되지만, 이는 북일 국교 정상화가 가시화되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현 시점에서 북한에게 대일 접근은 한미일 공조에 균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효과적인 카드가 된다. 특히 북미 협상이 지체되거나 교착될 경우, 북한에게 일본은 미국에 우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철저히 배제하고자 할 것이다. 한일관계가 악화될 경우 그 효과는 배가된다. 한편, 대만 유사시 군사적 개입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일본에게, 북한이 가지는 전략적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아베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따라서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된다. 새롭게 구성된 연립정권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평양행의 결단은 다카이치에게 강력한 정치적 유혹이 된다.
5. '경주 이니셔티브'와 능동적 평화공존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헌법적, 군사적 실체로 구체화하고,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 및 일본과의 직거래를 시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한국 외교가 직면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은 일시적인 소외가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주변국의 전략적 이익이 맞물려 한국의 외교적 공간이 구조적으로 차단되는 복합적 고립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라는 당위성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행위는 고립의 심화로 귀결될 수도 있다. 북한이 핵무력을 갖춘 불균형 상황에서, 과거의 수동적인 균형외교를 답습하는 것 또한 현실적이지 않다. 한국이 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이를 발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용한 외교적 자원(힘)을 최대화하고, 이를 토대로 적극적 개입과 능동적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2025년 11월 경주 APEC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제시한 원자력 추진 잠수함 도입과 핵 잠재력 확보라는 의제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 의제는 현실화 가능성과 무관하게 논의를 주도하고 지속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과 핵 협상을 진행할 때, 한국이 감수할 안보 불안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논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도 태평양 지역의 안보균형을 위해서는 미국의 확장 억제와 더불어 한국의 자체적인 비대칭 억제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된다. 이 점에서 한국정부가 경주에서 발휘한 이니셔티브는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이 북미 간의 합의를 수용하고, 다음 단계인 평화 체제 구축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국내적 합의 또한 이러한 비전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적극적 개입의 구체적인 사례는 대일정책이 될 수 있다. 다카이치 총리의 독자적 대북 접근 시도를 반대하거나 견제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 북일관계의 진전을 한국 대북정책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은 이미 한미일 군사 방위협력의 메뉴얼로 되어 있고, 이 틀 안에 한일협력은 당연시되어 왔다. 반면, 북한과의 대화 및 협상 국면을 상정한 정례적인 논의 테이블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당사자 원칙과 현실의 괴리, "재팬 패싱"이라는 조어의 등장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이 점에서 2025년 8월 이재명-이시바 첫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일 차관급 회의의 정례화는 좋은 출발이었다. 남북관계, 북일관계, 북미관계의 선순환을 위해, 현시점에서는 북일관계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한일 간 전략대화 채널이 안정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한국의 이재명 정부는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지향하고 있다. 이 지향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을 계승하는 것이라면, 제1원칙은 북한의 '무력 도발 불용'이 된다. 현실적인 억제력이 전제되지 않은 '포용'은 현상변경을 용인하는 '유화'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경주 이니셔티브의 함의와도 상통한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평화적 두 국가론은 우리가 힘의 우위에 있을 때 비로소 평화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일 수 있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실존하는 핵무력을 기반으로 한 단절과 교전을 위한 논리이다. 여기서 우리가 공존을 위해 내민 '국가 인정' 카드는 역설적으로 북한이 워싱턴·도쿄와 직거래할 수 있는 외교적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북한이 도발할 명분을 주지 않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특수관계의 평화적 관리'라는, 보다 능동적인 평화공존의 접근법이 필요할 때다.
참고문헌
1.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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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통신.202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사이의 포괄적인 전략적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 6월 20일.
2. 논문 및 연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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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곤. 2025. "돌아온 트럼프: 한미동맹과 북한 비핵화". 『한국국가전략』,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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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in, Robert L., and Hecker, Siegfried S. 2024. "Is Kim Jong Un Preparing for War?". 38 North (January 11, 2024).
Cha, Victor, and Kim, L. 2024. "The Russia-North Korea Axis: A New Strategic Threat in Asia". CSIS Beyond Parall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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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岩俊司. 2025. 「金正恩体制の強国政策と外交展開 : 国防力強化と安全保障環境の組み替え (김정은체제의 강국정책과 외교전개: 국방력강화와 안전 보장환경의 재편)」. 『国際問題』, 726.
■ 박정진_쓰다주쿠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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