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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NK 논평] 주한미군의 현재적 가치와 우리의 대응 방향
전재우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Editor's Note

전재우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주한미군이 동아시아 안보환경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어떻게 역할을 조정해왔는지 분석합니다. 전 연구위원은 주한미군이 미국의 전세계적인 대중국 견제전략의 중요 요소였으며, 한미간 양자관계를 넘어선 존재임을 부각시키면서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에 따라 한국은 연루위험과 억지력 약화라는 전략적 딜레마에 봉착하였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대응하여, 저자는 한국이 보다 능동적인 전략적 자율성을 획득하고, 한미동맹을 한국의 국력과 지위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관계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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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언명은 한미 양국 모두에게서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이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은 같을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 또, 주한미군의 가치와 역할은 고정불변의 성격일까? 이 글은 동아시아 안보환경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주한미군의 통시적 궤적을 추적하여 동아시아 안보환경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주한미군의 어떻게 조정되어 왔는지, 특히 현재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이 직면한 구조적 딜레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미국 동맹 정책의 본질: 현실주의적 전략적 우선순위

 

주한미군을 논하기에 앞서, 미국의 동맹 정책을 추동하는 근본적 동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대외적으로 민주주의, 인권, 자유무역 등 소위 ‘보편적 가치’를 표방하지만, 그 기저에는 자국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최우선적인 현실주의적 목표가 자리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적과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경쟁자가 되는 것을 반복해왔다. 이러한 유동성을 가장 명확하게 입증하는 사례는, 멀리에서 찾을 것도 없이, 미일 관계의 역사적 궤적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초, 미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의 한반도 진출을 용인하고 지원했다.[1] 그러나 태평양에서 일제의 팽창이 자국의 이익과 충돌하자, 군사적 대결을 선택했고, 원자탄을 투하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연합국이었던 소련에 맞서기 위해 일본을 서태평양의 핵심 보루로 삼아 경제적 재건과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 GDP의 70% 수준에 도달하자, 미국은 일본을 경쟁국으로 간주하며 ‘플라자 합의’를 통해 견제했다. 그리고 냉전 종식 후부터 중국이라는 거대한 도전자가 부상하자, 미국은 다시 일본과 손을 잡고 미일 동맹을 대중국 견제의 핵심 동맹국으로 격상시켰다.

 

이처럼 미국에게 동맹은 가치와 규범에 입각한 관계라는 측면보다는, 시기별 위협 인식과 자국의 전략적 목표에 따라 그 가치와 역할이 재정의되는 전략적 도구이다. 한미동맹도 예외일 수 없다.

 

미국의 대외 전략은 이처럼 자국의 패권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하며, 이는 잠재적 패권 경쟁국의 부상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추구된다. 이 같은 최우선적 전략적 목표의 관점에서 볼 때, 남북한과 주변 미중일러 4대 강국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인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은 이러한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적 수단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주한미군은 남북 관계의 국지적 맥락을 넘어, 미국의 패권 유지 전략과 강대국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냉전기 주한미군의 가치와 가변성: 닉슨과 카터 행정부 사례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은 한국은 1953년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양국의 상이한 전략적 계산을 반영하는 비대칭적 성격을 초기부터 내포했다. 이 시기 한국의 관점에서 주한미군은 주로 북한의 남침 시 미군의 자동 개입을 보장하는 기제로 인식되었다. 반면, 미국의 관점에서 주한미군은 다층적 목적을 지닌 지정학적 수단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미국의 대소련 봉쇄·억제를 위한 전 지구적 전략의 한 부분이었다.

 

또한, 주한미군은 한반도에서 남북 모두의 모험주의를 방지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나아가 한미동맹은 핵을 보유한 미국과 소련 간 갈등의 최전방에 노출될 것을 우려하는 일본의 안보 불안을 완화시켜, 서태평양에서 소련의 팽창을 견제할 핵심축인 주일미군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주둔을 담보하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했다.

 

냉전기 동아시아의 이러한 안보 아키텍처는 기본적으로 유지되었으나, 주한미군의 내재적 동학은 미국의 위협 인식 및 전략환경 변화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부침을 거듭했다. 특히, 베트남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한 미국은, 미소 양극 대결 체제를 일정 부분 완화하고 새로운 세력 균형에 입각한 전략적 안정을 추구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러한 전략적 전환의 핵심적 기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중소 분쟁에서 찾아왔다. 미국은 이를 ‘황금 같은 기회’로 활용하여 미국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고자 했다.

 

닉슨 행정부와 헨리 키신저는 먼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소련을 압박하고, 연이어 소련과의 데탕트를 추진하는 삼각 외교를 구사함으로써 미국이 중소 갈등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구도를 만들고자 했다. 이 정교한 외교적 기동은 단순히 강대국 관계 재편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전의 종결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적 연계로도 이어졌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 변화는 주한미군의 재조정으로도 이어졌다. 닉슨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하자 소련이 독자적으로 남진할 가능성과 한반도에서의 전면전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졌다고 판단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1년 미 7사단을 철수하고 2사단의 위치를 후방으로 조정했다.

 

연이어 카터 시기에서도 주한미군과 관련한 미국의 일방적 조정 결정이 반복되었다. 카터는 대선 과정에서 주한미군(당선 이후 지상군)의 철수를 주장했는데, 표면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내세웠으나, 그 구조적 동인은 베트남전의 후유증과 1차 오일쇼크가 야기한 미국의 정치·경제적 난맥상 등의 제약이었다.

 

결국, 닉슨과 카터 행정부는 표면적으로 상당히 상반된 외교 노선을 세웠지만, 모두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의 현상 변경을 시도했다. 이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태세 및 규모가 우리의 의지, 양자 관계, 또는 동맹 자체의 논리보다는 강대국의 국제정치와 미국의 전략환경 변화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실제 사례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결정적 전환점: 1992년 미국의 입장 선회와 배경

 

1980년대 말, 미국은 냉전 체제의 종언이라는 구조적 변화로 인해 주한미군을 포함한 미국의 역내 동맹 정책은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이에 미국 내에서는 해외 주둔 미군의 역할과 규모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1980년 5.18에 대한 책임론과 이후 이어진 민주화운동, 불평등한 SOFA 문제의 부각 등으로 인한 주둔 부담 및 동맹 관리 비용을 줄이고자 했다. 막대한 미국의 쌍둥이 적자 등의 내부적 제약 등이 거론되던 상황과 일본 경제가 미국 GDP의 약 70%에 육박한 사실도 이러한 논의의 명분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동아시아전략구상(EASI)’이다. 이 구상은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과 함께, 작전통제권의 단계적 전환을 담고 있었다. 당시 미 의회와 안보 전문가들은 한국의 방위 역량이 충분히 성장했음을 인정하며 작전통제권 전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1987년 대선에서는 집권 여당의 노태우 후보와 주요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 모두 작전통제권 전환을 핵심 선거공약으로 채택했다. 1990년 딕 체니 미 국방장관도 방한하여 평시작전통제권의 조기 전환을 요구하는 등, 1990년대 초반까지 작전통제권의 전환은 하나의 추세를 이루었다.

 

동아시아전략구상은 1990년 미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공식보고서 『아태지역을 위한 전략적 틀: 21세기를 향하여 (A Strategic Framework for the Asian Pacific Rim: Looking Toward the 21st Century)』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향후 10년간 아태지역 주둔 미군을 3단계에 걸쳐 점진적으로 감축하고,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들의 방위비 분담 증액을 골자로 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 작전통제권 전환, 한국군의 역량 강화 등이 함께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1990년대 초, 급변하는 안보 지형 속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1992년 5월, 로버트 리스카시(Robert W. RisCassi)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은 순조롭게 진행되던 작전통제권 전환 논의에 갑작스러운 제동을 걸었다. 이는 개인 차원이 아닌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 선회를 의미했다. 이러한 전환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었다.

 

첫째,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가치 증대: 탈냉전 이후 세계의 정치·경제적 중심은 유럽에서 아태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미국에게 이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교역과 패권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핵심 국익이었다. 특히 필리핀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상대적으로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가치는 더욱 증대되었다. 미국 전문가들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주일미군 또한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둘째, 중국이라는 새로운 패권 경쟁국의 부상: 1980년대 말 미국이 경계한 대상은 경제 대국 일본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은 개혁·개방의 성과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은 소련을 대체할 새로운 잠재적 패권 경쟁국 부상 가능성이 있는 국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대한 군사적 통제력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셋째, 북한 핵 문제와 한국의 독자 행동에 대한 미국의 우려: 한소·한중 수교와 미국과의 교차 수교 실패로 외교적 고립에 처한 북한이 핵 개발을 추진하자, 1991년 4월 이종구 당시 국방장관은 북한의 핵 시설 타격을 시사했다. 이는 미국의 관점에서 북한 핵시설에 대한 한국의 선제 타격 가능성으로 읽혔고, 미국 조야에 큰 파장을 낳았다. 1954년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해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확보한 근본 이유 중 하나가 남한의 단독 북진과 같은 돌발 행동에 미국이 연루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이러한 1990년대 초의 남북관계는 미국의 통제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 소련 해체 이후 최대 지원국을 상실한 북한의 붕괴 가능성: 작전통제권이 한국에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붕괴될 경우, 한국이 한반도를 통일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는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 명분의 약화 또는 소멸 가능성을 의미했다. 미국은 이 같은 변화가 한국의 민주화 추세 와 맞물릴 경우 1991년 필리핀에서처럼 미군이 완전히 철수해야 하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다섯째, 한국 내 대미 비판적 여론의 약화: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직선제 투표에 기반한 대통령 선출을 통한 정권의 정통성이 확보됨으로 인해 한국 내 민주화운동 추세가 약화되면서, 미국의 동맹 관리 비용과 주둔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다. 사실 1994년 미국이 평시와 전시를 나눈 개념을 썼던 것은 1979년 12·12와 1980년 5·18과 관련하여 미국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한국군 부대의 행적의 배후에 미국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과 비난을 의식한 결과였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1차 보고서 당시의 기존 계획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대신 미국은 주한미군을 포함한 역내 전력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핵심 자산으로 재인식하고,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1차 보고서에서 계획되었던 군비 감축 및 단계적 철수는 중단되고, 아시아 역내 주둔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완전히 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면, 그 효율성과 통제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 행사도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1992년 이후 미국의 입장 선회는 한미동맹이 한국의 안보를 넘어 미국의 패권 전략에 깊숙이 연루되는 궤도에 올라탄 결정적 계기였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 추진되던 한국의 작전통제권 전환도 1992년에 미국의 입장이 180도 선회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그리고 미국은 이후 약 10년간 주한미군 태세 조정 계획에 착수했다. 그 결과 한국 도처에 분산되어 있던 주한미군을 중국을 마주한 평택 캠프 험프리스로 집결시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주한미군, 주일미군, 7함대를 한데 묶는 성격의 ‘동북아 사령부(Northeast Asia Command, NEAC)’를 비밀리에 추진했다. 비록 한국의 반발과 미군 내 각 군의 이해관계 대립 등으로 실제 창설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는 중국의 부상 이후 한미일의 ‘통합’구조, ‘하나의 전구’ 구상, 한미 간 ‘전략적 유연성’ 문제 등의 원형이라고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1990년대 초부터 미국이 대중국 견제를 위한 전력 재편에 착수한 것은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를 야기한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이 시점부터 한국은 소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개념 아래 자국의 안보가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 연루될 수 있는 위험과, 본연의 대북 억제 임무가 약화될 수 있다는 이중 안보 딜레마에 노출되었다. 동맹의 목표와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한미 간 근본적인 전략적 불일치는 이후 한미 간의 지속적인 협의에도 불구하고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2001년 9·11 테러와 이른바 ‘럼스펠드 독트린(Rumsfeld Doctrine)’을 기점으로 2000년대 초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 논의의 기원을 찾는다. 이는 미국이 단일 패권 경쟁국을 직접 겨냥하기보다는, 중동 지역 개입을 포함한 전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군사적 개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주한미군의 운용 개념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2003년경부터 진행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관련 논의가, 2006년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간 공동성명 및 정부 간 양해각서(MOU)를 근거로 한·미 간 합의로 귀결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원론 및 ‘합의’에 대한 해석은 개별적으로는 사실이지만, 1950년대부터 극동사령부(FECOM)를 원형으로 하는 통합 모델 및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 시도가 다양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중 중국의 잠재적 패권 경쟁국 부상 가능성을 고려한 조정 국면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소한 1990년대 초를 결정적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단순한 구상 단계에 그치지 않고, 주한미군 규모와 한국군 작전통제권에 관한 부분적 조정이 이미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시점부터 역내 주한미군의 맥락은 미·중 전략 경쟁과 연계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으며, 한·미 간 주요 쟁점들도 이때부터 현재까지 구조적으로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울러 2006년 사례는 실질적 합의라기보다는, 해당 쟁점에 대한 상호 ‘존중’ 수준의 외교적 표현 또는 일시적 봉합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적절하다.

 

결론: 우리의 안보전략을 위한 제언

 

상술한 주한미군의 역사적 궤적은 주한미군의 기능과 한미동맹의 본질을 남북 관계나 한반도라는 국지적 틀로만 환원하거나 고정된 실체로 간주하려는 국내 일부 담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한다. ‘전작권을 전환이 주한미군이 철수 등 한미연합태세의 와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미국의 동맹 정책의 현실주의적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잘못된 인과론이다. 본질적으로 주한미군과 미국의 동맹정책은 미국의 세계적 차원의 전략을 구현하는 도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을 포함하는 미국의 동맹 정책의 존속과 역할은 미국의 국익과 전략이라는 목적을 위한 하위 변수이며,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황적 가변성을 지닌다.

 

현재 미국의 동맹 정책은 이전 민주당 행정부가 추진한 통합억제전략과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기조 하 선택적 개입 및 동맹의 1차적 역할 확대 요구 사이에서 유동적이며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엘브리지 콜비(Elbridge Colby) 전 국방부 정책차관은 주한미군의 임무를 중국 견제에, 한국군의 역할을 대북 재래식 방어에 보다 집중하도록 하는 전력 재편 구상을 제안하였으며, 일부 미국 내 싱크탱크는 역내 다른 지역에서의 미군 운용 필요성을 근거로 주한미군 감축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히 행정부 간 정책 차이로 환원될 수 없으며, 구조적 괴리의 심화라는 보다 근본적인 요인 속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양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현재 이러한 한미동맹의 본질과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는 한국에 구조적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지만, 이에 대한 공론화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제약되고 있다. 동맹을 일종의 고정된 실체이자 '성역'으로 간주하며, 합리적 토론과 비판적 검토를 금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변화하는 안보환경 속에서 우리의 전략적 선택지를 제약하는 내부적 족쇄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

 

최근 한·미 간 관세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해, 주한미군이 북한뿐 아니라 중국 억제 성격임을 공개적으로 표명·지지할 것을 요구했다는 일부 매체 보도가 있었다. 반면, 8월 24일 한·미 정상회담 직전 전용기 기자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 측 요구에 대해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발언하였다. 이는 양측 모두 주한미군의 규모 및 운용과 관련된 논쟁이 본질적으로 미·중 전략 경쟁이라는 구조적 요인에 기반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의 구조적 핵심적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미국의 주요 전략적 경쟁국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전환되었고, 중국의 팽창 양상은 소련과 근본적으로 상이하다는 점이다. 소련의 팽창은 한반도 남진을 전제하였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지상전을 염두에 둔 전력 태세를 요구하였다. 한국 역시 주로 북한 지상군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 기존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은 이러한 지정학적·군사전략적 이해 위에 구축되었다. 반면, 중국의 팽창은 동중국해·남중국해 등지에서의 해·공군 중심 세력 투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한·미의 기존 태세와 미국이 직면한 중국의 팽창 간에는 전략적 괴리가 발생하였다.

 

둘째, 작전통제권 환수 패턴의 성격 변화이다. 냉전기에는 주로 강대국 간 데탕트 국면에서 한국군의 자주적 역량 강화 및 작전통제권 환수가 논의되었다. 반면 현재는 미·중 경쟁이 심화되는 국면에서 한국군 역량 강화 및 전작권 환수 논의가 병행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구조적 괴리를 메우기 위한 일환으로, 한반도 전장 관리 능력을 한국이 보다 주도적으로 확보할 필요성에 기인한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구조적 이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과 한국군의 자주적 역량 강화가 미국의 전략적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군의 역량증대에 비례하는 통제력 행사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군사 역량을 고려할 때, 극소수 미군 잔류를 통한 통제 구상은 현실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

 

또한, 한국군 역량 강화가 과거와 달리 미국의 부담을 경감한다는 점, 그리고 증액된 국방비와 전작권 환수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조해야 한다. 방위비 분담 문제도 전작권 환수를 전제로 하는 방안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협상과정에서 핵연료 재처리 제한 완화 등 전략적 가치가 높은 사안과의 연계 역시 고려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국력과 위상에 걸맞게 동맹을 보다 합리적인 관계로 재정립하는 모든 과정은 국민의 안보와 역사 인식 수준의 함양으로 뒷받침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1] 이 자체로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대한제국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완전히 뒤집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 저자: 전재우_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 담당 및 편집: 오인환_EAI 수석연구원; 정종혁_국립외교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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