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연구원(East Asia Institute, EAI)은 5일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2026년 한국의 주변국 외교 및 대북 전략 컨퍼런스: 신년 대담회'를 개최했다. 이번 신년 대담회는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화와 강대국 간 지정학적 경쟁 심화 속에서 주변국인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을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 변화에 대응해 한국의 대중·대러 외교 정책과 대북 전략을 재검토하고 국익 중심의 균형 잡힌 외교 정책 담론 형성을 도모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되었다.
전재성 EAI 원장은 개회사에서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외교 환경이 변화하고 북한의 전략 노선이 재조정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로 인해 한국의 대중·대러 외교 및 대북정책이 중요한 전환점에 놓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주변국 외교 전략을 심도있게 논의하는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 매우 시의적절하며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전재성 EAI 원장은 개회사에서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한국의 주변국 외교 전략을 심도있게 논의하는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 매우 시의적절하며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제1세션: '국제정세 변화와 한국의 주변국 전략'
제1세션 '국제정세 변화와 한국의 주변국 전략'은 전재성 EAI 원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동 세션에는 △박원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EAI 북한연구센터 소장) △신범식 서울대학교 교수 △조영남 서울대학교 교수가 참여했으며,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이 추구해야 할 주변국 외교 전략과 대북정책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의 국가발전 전략을 정치·경제·외교·군사 영역에서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경제·기술 역량 강화와 외교적 자율성 제고를 통해 전략적 선택지를 확대하는 방향의 정책 설계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북한의 대외관계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에 따르면,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신냉전 및 다극 체제를 활용해 과거 냉전 시기와 유사한 '진영주의'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 북한은 핵 고도화를 통해 스스로를 미국과 대등한 '전략 국가'로 규정하고, 대외 정책의 목표를 '비핵화'가 아닌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전제로 한 '핵 군축 협상'으로 전환했다. 2019년 선포된 '정면 돌파전' 기조 아래, 외부 세계와 선을 긋고 중국·러시아와의 협력을 지렛대 삼아 내부 자력갱생과 핵 능력 강화에 집중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박 교수는 2026년 대미 관계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이 크지만, 상호 목표 차이로 인해 실제 합의는 난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북한은 인도·파키스탄 모델처럼 핵 보유를 묵인받으며 경제 제재를 해제하길 원하지만, 미국은 본토 위협 제거(ICBM 포기)를 최우선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베네수엘라 사태와 같은 미국의 실효적인 무력행사는 북한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해 협상장으로 이끄는 동력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북·중·러 연대는 '반미'라는 공동의 목표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정체성 차이와 실리 중심의 외교 방식으로 인해 결속력에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러-우 전쟁 이후 러시아 외교안보 전략과 한-러 관계
신범식 서울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서방의 국제전,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가전, 돈바스 내전이 얽힌 '삼중 전쟁'의 구조를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2026년 상반기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주도로 종전을 향한 타협점이 모색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또 세계 질서는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에서 벗어나 '탈단극화' 시대로 진입했다고 밝혔다. 특히 경제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는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은 기존 서방 중심 질서에 구조적 균열을 일으켰으며, 러시아는 이를 활용해 중국·인도와의 삼각 협력 및 유라시아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북·러 관계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며 한반도에 새로운 긴장을 조성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미국과의 전략적 타협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기보다는 '점진적 관계 강화 및 관리'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러 직항 재개나 경협 차관 상환 문제 등 실질적인 현안을 지렛대 삼아 소통 채널을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러시아를 무조건적인 적대국으로 돌리기보다 전략적 소통을 통해 한반도 대립 구도를 완화하고, 러시아가 다시 균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유연한 외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국가발전 전략과 한국 정책
조영남 서울대 교수는 현재 중국을 지배하는 핵심 논리를 '경제 발전 최우선'에서 '발전과 안보의 병행'으로의 전환이라고 규정한다. 2020년을 기점으로 중국은 미국의 견제에 맞서 정면 대결을 선택했으며,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공산당 집단의 합의된 전략이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5세대(최고지도부)와 6세대(실무 장관급)의 통합 체제인데, 특히 이공계 박사 출신 엔지니어들이 장관급의 절반을 차지하는 '전문가 통치 체제'를 통해 30년간 축적된 과학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현재의 갈등을 단순한 통상 마찰이 아닌 '패권 전쟁'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해 '글로벌 사우스(개도국)'를 우군으로 확보하는 연결성 전략(일대일로 등)을 20년 넘게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고 밝혔다. 군사 및 핵 전략에서도 기존의 '최소 억제'에서 '최대 억제' 전략으로 선회하며 핵탄두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다. 이는 미국에 맞서 동아시아 내 부분적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조 교수는 설명했다.
가장 충격적인 분석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의 실종이다. 중국 스스로 핵전략을 강화하면서 북한에만 비핵화를 요구할 명분이 사라졌고, 이는 사실상 북한의 핵 보유를 묵인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중국이 한국을 한국 자체의 가치, 남북한 균형, 미중 패권경쟁이라는 세 가지 틀로 보는데, 현재는 '미중 경쟁 속에서의 한국 활용도'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 한국 주도의 우위 관계는 끝났으며, 이제는 중국 주도의 경쟁 관계로 역전되었다고 설명했다.
대만 유사시 미군의 개입 한계와 중국의 사활적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동아시아 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국내 정치적 갈등과 국민 정서까지 설득해야 하는 삼중고에 직면해 있다고 조 교수는 말했다. 이어진 패널 토의에서는 현실적인 정책 선택지를 도출하고 전략적 논의를 위한 기준점을 마련하는 방안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의하였다.
제2세션: '한국 여론과 주변국 인식'
제2세션에서는 손열 연세대학교 교수(EAI 석좌연구위원)의 주재로 '한국 여론과 주변국 인식'에 대한 발표와 토의가 이어졌다. 동 세션에는 △안경모 국방대학교 교수 △장세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 연구위원 △전병서 중국금융경제연구소장이 참여해, 미·중 전략경쟁 속 중국의 구조적 변화와 시장 경쟁력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한국의 전략적 대응 방향을 논의하였다.
논의 과정에서는 냉철한 경제 논리에 기반해 중국의 거대 시장을 활용하는 한편 미국의 기술 역량과 결합함으로써 대체 불가능한 국가 경쟁력을 확보할 필요성이 언급되었다. 또한, 국익 중심의 균형 잡힌 정책 담론 형성을 위해 국민적 여론과 인식을 어떻게 형성·확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을 중심으로 심층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북한의 체제안정성과 대북정책
안경모 국방대 교수는 북한 체제 안정성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대북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라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시간은 누구의 편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북한의 붕괴 가능성과 핵 개발 완성 시나리오 중 어느 쪽이 현실적인지에 따라 우리의 전략적 선택이 달라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만약 북한 체제가 예상보다 견고해 핵 고도화가 지속되는 시간표라면, 기존의 제재와 압박 위주인 '현상 유지' 전략에서 벗어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과감한 '현상 타파' 전략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그러면서 안 교수는 북한이 극심한 고립 속에서도 버티는 비결로 정교한 엘리트 관리와 기득권 보장 시스템을 꼽았다. 독재 정권의 생존 원리인 '승리 연합'에 집중해 핵심 계층의 충성을 유도하고, 정보 통제를 통해 민중 저항의 결집을 차단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김주애의 등장은 후계 정치를 조기에 가동함으로써 체제 전복의 위험을 낮추고 영속성을 과시하려는 전략적 행보로 풀이했다. 그는 북한의 위협 요소뿐만 아니라 정권의 위기대응 자산까지 균형 있게 바라보는 '상식적 판단력'의 강화를 주문했다.
한국 신정부 출범 이후 한러관계: 현황과 제언
장세호 INSS 연구위원은 현재의 국제질서를 미국의 패권이 도전받는 '능동적 비관의 시대'로 규정하며 한러 관계의 전략적 재설정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장 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러 군사동맹 복원으로 인해 양국 관계가 역사상 최악의 저점에 처해 있지만, 명분 있는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다극화 흐름 속에서 러시아를 단순히 배척하는 것이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미국조차 러시아를 '전략적 안정성' 차원에서 외교적·경제적 관리 대상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만큼, 우리 역시 국익 중심의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어 장 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골격이 잡혀가는 '포스트 워' 시대를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피하기 위해 한국을 유망한 동북아 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 종료를 기다리기보다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경제·통상 분야부터 실질적 협력을 추진하는 능동성을 주문하며, '신북방정책 2.0'과 같은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다. 특히 안보실 내 북방 전담 체제 구축을 통해 한러 관계가 외교 우선순위에서 방치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미중의 패권경쟁 속 중국의 변화와 한국의 전략
전병서 중국금융경제연구소장은 지난 8년간의 미중 갈등 속에서도 중국이 건재함을 과시한 데이터를 제시하며, 이제는 감정적인 '탈(脫) 중국'이 아닌 실리 중심의 똑똑한 '용(用) 중국'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 소장은 중국이 미국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무역 흑자 1조 달러를 기록한 것은 단순한 운이 아닌 세계 최대의 제조 생태계라는 실력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의 0.8% 저성장 기조를 타개하기 위해 연 5%대 성장을 유지하는 중국이라는 '천리마'의 등에 올라타야 하며, 특히 중국을 핵심 원자재를 공급받는 '제2의 중동'으로 인식하고 공급망 안정성을 최우선 국익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전 소장은 AI 전쟁 시대에 한국이 보유한 '온리 원(Only One)'의 경쟁력인 반도체와 HBM을 미중 사이의 강력한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이 모두 절실히 원하지만 갖지 못한 전략 물자를 활용해 양국 시장에서 결핍을 채워주는 영리한 외교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과거의 단순 완제품 수출 방식에서 벗어나 중국 금융 시장의 높은 밸류에이션을 활용해 돈을 일하게 하는 방법으로 금융 중심의 진화된 출구 전략을 짜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편견과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한 경제 논리로 중국의 결핍을 공략하는 것만이 미래 한국 경제의 생존법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신년 대담회에는 중·러 대사관, 싱크탱크 관계자 및 내외 언론인, 주한 외국인 석·박사 등 90여 명이 참석해 한국의 주변국 외교와 대북 전략 및 상호 인식 제고에 대한 높은 관심을 표명했다. EAI는 앞으로도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 및 대북 관계 증진을 위한 정책 제언 활동을 지속함으로써, 국익 증진과 한반도 평화 유지, 그리고 비핵화 체제를 위한 건설적인 논의를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