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부 외교 정책 제언 스페셜리포트] ① 국제질서의 변화와 미중 전략 경쟁, 신정부의 외교안보 전략 과제
ISBN 979-11-6617-929-7
I. 트럼프 정부 발 국제질서의 변화: 국제질서의 혁명적 변화인가
1. 구조가 만든 전략: 개인보다 시대의 산물
미국의 리더십이 핵심적 역할을 하는 현재의 국제질서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안보 전략 변화는 국제질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하는 바처럼 미국의 전략이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중요한 점은 미국의 외교안보전략이 트럼프 대통령의 개별적 성향이나 정책 선택에 의해 형성되는 부분도 크지만, 미국이 직면한 국제질서의 구조적 전환이라는 배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복귀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바이든 정부가 지속되었더라도, 미국은 패권 질서를 재조정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트럼프 2기 전략은 예외적 외교정책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미국이 처한 구조적 상황에서 비롯된 조정 시도로 볼 수 있다.
2. 패권전략의 피로: 패권의 비용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해온 패권적 질서는 막대한 국제공공재를 제공하며 무정부적 국제사회에 실질적 질서를 부여해온 독특한 체제였다. 미국은 자국의 자원으로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비정상적 구조를 감내해 왔으며, 이는 근대 국제정치사에서 예외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체제는 패권 유지와 경제적 부담 간의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일방주의적 조정은 반복되어 나타나왔다. 예컨대 닉슨 시대의 금본위제 해체, 레이건 정부의 군비확장과 달러 강세 정책 등은 모두 패권국으로서 미국이 내부 부담과 외부 책무 사이에서 균형을 재조정하고자 했던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은 다시금 그러한 조정기의 한복판에 있다. 그러나 지금의 조정은 단순한 주기적 조정의 반복이 아니라, 훨씬 더 심화되고 구조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구별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단극 패권은 세 가지 구조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는 국제공공재 수요의 급증이다. 테러리즘, 팬데믹, 기후변화 등 복합 위기에 대한 해결 요구는 패권국에 집중되며, 단순히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복합위기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둘째는 지구화로 인한 국제 불안정의 증가이다.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경제 체제는 빈부격차와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세계적으로 통합된 공급망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증폭시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기존 패권 질서가 제공하는 안정성의 한계가 노출되고 있으며, 패권적 리더십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고 있다. 셋째는 중국과 같은 전략적 경쟁국의 부상이다. 중국의 부상은 단순한 경제성장 차원을 넘어서, 안보와 규범, 기술과 산업체제 전반에 걸쳐 미국 패권에 대한 실질적인 도전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세력균형 논리를 다시 부상시키며, 미국 주도의 단극 패권 구조에 대한 구조적 도전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상충하는 세 개의 목표
이러한 도전들은 단순한 정책적 조정보다는 미국 외교의 전략적 방향을 재설정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으며,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패권적 경제기반의 재건과 지구적 리더십의 유지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며, 국내적으로 체제의 취약성을 낮추고 대외정책에 필요한 국내적 정치,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목표들이 상충하며, 목표 간의 긴장을 불가피하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예컨대 동맹국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지속될 경우, 미국의 안보전략에 대한 신뢰성과 협력 기반이 약화될 가능성은 현실적인 우려가 된다. 글로벌 리더십을 과도하게 추구할 경우 미국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이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지지, 국내경제적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
경제적 압박의 강화는 동맹국들로 하여금 자율적 핵무장이나 적대국과의 편승 전략을 추구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심각한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4. 패권 재설계의 시험대
트럼프 2기 전략의 독특성은 기존 행정부들과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질서의 안정성이나 제도적 일관성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미국의 즉각적 이익과 상대국의 기여를 우선시하는 일방주의적 접근을 선택해왔다. 이러한 전략은 동맹과 규범을 중시하던 전통적 미국 외교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와 같은 접근은 단순히 트럼프 개인의 기질적 특성이나 정치적 성향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국내 정치와 경제 구조에서 비롯된 정부와 국미니들의 패권 유지에 대한 피로감의 누적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약 30년에 걸친 단극 체제 동안, 미국 국민은 자국의 막대한 비용으로 세계질서를 유지해왔다는 인식을 강하게 형성해 왔으며, 이는 정치적으로 반패권적 내셔널리즘의 부상을 초래하였다. 트럼프는 이러한 흐름을 선명하게 정치화하고 제도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트럼프 2기의 외교안보전략은 일종의 정치적 실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전략적 조정이 아니라, 미국 패권의 유지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려는 시도이며, 그 과정에서 외교·안보 정책의 기존 정합성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닌다. 미국의 전통적 동맹 전략, 다자주의 기반의 리더십, 규범적 질서 구축 등의 접근은 모두 '상호 기여'와 '비용 분담'이라는 기준에 따라 재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트럼프의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국력과 자원의 내적 재정비를 위한 선택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재정립하고자 하는 구조적 변환의 예고일 수 있다. 트럼프 2기 외교안보 전략은 혁명적 단절이라기보다는, 누적된 피로의 폭발적 표출이며, 패권의 진화를 위한 고통스러운 조정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는 향후 미국 외교의 방향, 국제질서의 성격, 동맹의 구조 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으며, 트럼프 2기의 전략은 그 전환기의 예고편이자 실험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5. 트럼프 2기 100일 안보정책: ‘개입 축소’를 통한 경제력 회복과 ‘패권 유지’의 병행 전략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안보전략은 복합적 구조 속에서 두 가지 상충되는 목표—국내 경제기반 강화와 글로벌 리더십 유지—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국제분쟁 개입을 줄이며 자국 부담을 완화하고, 동시에 협상력과 군사적 억지력은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조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1기에는 NSS(2017) 및 인도-태평양 전략(2019) 등 공식 문서를 통해 전략적 일관성을 확보했으나, 2기에는 충성파 중심 내각 개편과 전략 커뮤니티의 축소로 인해 정책 생산의 체계성과 일관성이 약화되고 있다. 개입축소를 예고했지만, 중동, 우크라이나, 양안해협 등 다양한 지역에 선택적 개입을 시도하는 모순적 행보가 지속되고 있다. 동시에, 신현실주의 자제주의의 흐름이 부상하면서 군사적 거리두기와 권역별 강대국 협조 구도를 모색하는 전략도 병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중동, 인도-파키스탄, 한반도 등에서 미국의 지속적 개입을 통한 강한 억제력 확보 의지가 약화가 되고 있다. 러시아·중국·북한은 이를 세력 확장 기회로 삼고 있다. 이들은 ‘다자주의 복원’을 주장하나, 많은 국가들은 이를 세력권 확대 시도로 간주하여 기존 자유주의 질서와의 해석 격차가 커지고 있다. 미래 첨단기술에 기초한 안보를 놓고 바이든 정부는 첨단 기술 안보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디커플링 정책을 지속한 바 있지만, 트럼프 2기에서는 경제·기술·안보 간 전략적 정합성이 부족하고, 단기 이익 중심 접근으로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유럽 전략의 변화는 경제안보와 안보를 연계한 광물 협정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안보 공약의 명확성이 결여되어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요구를 자극하고 있다. 나토 대체 구상은 여전히 실현 가능성이 낮고, 핵우산 신뢰도도 약화되는 중이다. 트럼프 정부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지지, 네탄야후-트럼프 간 긴장과 전략적 견해 불일치, 이란 핵합의 복원의 불확실한 타결전망 등은 미국의 중재력 약화를 상징한다.
결국, 트럼프 정부의 외교안보전략은 혁명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전략적 목표의 연속성 속에 접근방식과 전술의 특이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변화가 국제질서 전체의 변화를 수반할지는 불확실하다. 구체적인 안보전략에서 개입축소를 통해 미국의 경제력 회복을 추진하면서 안보공백이 창출되어가는데 이를 차후에 미국이 다시 번복할지는 동맹국들의 역할 변화와 미국의 경제전략 성공여부에 달려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관세를 축으로 한 미국의 경제력회복전략의 전망은 매우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경제적 수단을 앞세워 안보목적을 달성하는데에는 한계가 있고, 미국의 국방 주류 세력들의 향후 대응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II. 트럼프 2기 대중 안보전략과 한미동맹의 재편
1. 우선순위 재조정 전략
2025년 상반기 발표된 미국의 국방 전략 잠정 지침은 미국의 지정학적 방어선이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멕시코, 캐나다,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 등 북미 주변의 ‘근외(near abroad)’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반구(Western Hemisphere) 방어 강화, 국경경비 강화 및 중국의 세력확장 억제가 주요 내용이다. 이는 유럽이나 동아시아 같은 전통적 전진 방어선에서 벗어나, 본토 직접 방어에 전략적 초점을 두는 경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은 두 개 이상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 따라 전략의 집중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군사력과 예산을 분산시키는 대신, 중국과 같은 핵심 경쟁국에 억지력과 역량을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전략적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재편은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 요구와 자주방위 역량 강화 요구로 직결되며, 미국 단독의 전략 수행이 아닌 동맹 중심 전략으로 전환되는 배경이 된다.
2. 대중 거부 전략과 도련선의 확대 방지
트럼프 2기 국방전략의 근간에는 엘브리지 콜비의 ‘거부 전략(Strategy of Denial)’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콜비는 군사 패권국의 지역적 부상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미국 패권의 유지에 필수적이라 보며, 중국이 도련선 안에서, 즉 자신의 지역 내에서 군사적 패권을 형성하는 것을 미국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1도련선 내에 위치한 동맹국의 기여를 강조하는 억제 전략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최근 대만 내부에서 자주방위 의지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고, 미국 내부에서도 대만 방어에 대한 피로감과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전략적 방어선이 1도련선에서 2도련선으로 후퇴할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는 한국의 전략적 위상을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도련선이 후퇴할 경우, 한국은 중국 견제를 위한 전방 거점으로서의 부담을 더욱 크게 안게 될 수밖에 없다.
3. “억지력의 이양”: 한미동맹 구조의 전략적 전환
미국은 북한을 단기 군사위협이 아닌, 장기적 억제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본토 위협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아직 실질적인 능력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주류다. 트럼프 2기 정부에서는 대북 억제의 중심축을 점차 한국으로 이양하는 전략이 구체화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연합전력 및 전작권 체계를 기반으로 억지 능력을 실질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통상전력 분야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대북 군사억제 기능을 맡도록 제언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재까지 대북 핵확장억제에 대한 보장은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중요한 점은 주한미군의 기능 변화의 조짐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북한 억제가 중심 임무였지만, 앞으로는 중국 견제를 위한 전략적 자산으로서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개념이 실제 정책으로 전환되며,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의 일부 전력이나 장비가 전용될 가능성, 다양한 병참 지원도 제기된다. 이는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이 한반도 방어에서 동아시아 질서 유지로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에서 방위비 분담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안보공동체의 신뢰 문제라기보다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철저한 경제적 사안으로 접근되고 있다. 주한미군 감축이나 유지는 군사적 판단보다도 예산 및 비용분담 문제와 연동되어 있으며, 향후 논의의 초점은 억지 역량의 강화와 역할 분담 재조정에 맞춰질 전망이다. 한국은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되, 미국의 전략적 주도권은 유지되는 구조가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III. 차기정부의 외교안보과제
1.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변화와 공진적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점차 약화되면서, 이를 대체하려는 여러 구상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복원 가능성이다. 트럼프 2기의 전략이 실패하거나 과도하게 거래적 성격으로 흐를 경우, 미국 내 민주당 혹은 공화당 주류의 복귀를 통해 다시금 동맹 중심의 다자협력 체제가 재구성될 수 있다는 전망도 유효하다. 이 시나리오는 특히 나토의 재정비, 미국 주도의 집합적 리더십 회복, 미중관계의 안정화 이후 동아시아 질서의 재설계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는 ‘미국 없는 다자주의’라는 시도이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지 않더라도, 중견국들과 선진국들이 자유주의 규범을 바탕으로 새로운 다자협력을 추구하자는 구상이다. 일종의 안보판 CPTPP라 할 수 있는 이 모델은 가치와 비전의 합의라는 강점은 있으나, 전략적 추진력과 강제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약점이 존재한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다자주의’를 강조하고 있으나, 이는 비자유주의적 목적을 중시하여 아직은 통합의 여지가 약하다. 또한 자유주의 선진국들 간 중견국 연합은 역량 부족, 내부 분열, 미국의 반발 등 복합적 제약에 직면하고 있다.
셋째는 강대국 간 거래체제의 조성이다. 역사적 유대나 이념을 뛰어넘어, 최상위 군사 강대국들 간의 권역 분할과 세력권 협조를 통해 국제질서를 안정시키려는 접근이다. 기존 자유주의 질서와는 구조적, 철학적으로 단절된 이 구상은 트럼프식 외교의 실용주의적 태도와 결합되면서 점차 현실정치적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중국, 러시아와의 세력권 조정은 비공식적 합의와 양자협상을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향후 국제질서는 과거처럼 한 국가가 단독으로 패권적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어떤 국가도, 설령 미국이 패권을 회복하더라도 단독으로 국제사회를 이끌 수 없다. 기후변화, 팬데믹, 디지털 통제, 인공지능, 사이버 안보 등 국제 공공재에 대한 수요가 너무나 급속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범지구적 대응을 요구하며, 단일국가의 자원이나 정치적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다. 국제질서의 필연적 귀결은 집합적이고 공동의 리더십(collective leadership)의 등장이다. 어느 한 국가가 이끄는지가 아니라, 어느 국가가 다양한 선진국 및 중견국들과 연합하여 질서를 관리하고 운영하느냐가 핵심이 되는 시대이다. 이 구조 속에서 한국이 원하는 질서는 단순한 참여나 안보 보장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한국이 바라는 질서는 단순한 다자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 규범에 기반을 두고 한국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진적 자유주의 질서(co-evolutionary liberal order)이다. 이 질서는 과거의 일방적 서구 중심 자유주의를 복제하지 않으며, 국제 공공재의 공급과 규범 형성에서 중견국들의 적극적인 기여와 발언권을 전제로 한다. 한국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핵심 원칙을 공유하면서도 지정학적으로 복합적 균형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다자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국제구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다자주의가 어떠한 규범과 원칙, 가치를 바탕으로 작동하느냐이다.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규칙기반 질서는 한국의 안정과 발전에 호의적 환경이었고 앞으로 이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면 한국에게 유리할 것이다. 중국 역시 다자주의와 규칙 기반 질서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다만 중국이 주도하는 다자주의가 약한 국가들의 자유와 주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실질적 국제질서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러한 질서 논의에서 소극적 수용자가 아니라, 원칙 있는 동반자이자 설계 참여자로서의 입장을 확립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중국이 이러한 방향으로 다자주의를 전개할 수 있도록 기대와 요구를 표현해야 하며, 자유주의적 질서의 핵심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구체적인 국제 정책과 외교 전략을 통해 이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앞으로의 외교는 단순히 ‘생존’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이다. 한국은 외교적 실력, 정책적 정합성, 국내 통합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질서 형성과 위기 관리의 동시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때 실용외교는 중요하지만, 장기적 외교 레버리지를 보장하는 첨단기술 시대의 실력축적외교, 질서외교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2. 미중 전략 경쟁과 한국의 과제: 신냉전이라는 오해와 공존 속 대결, 대결 속 상호의존
한국의 대응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한국이 원하는 국제질서의 미래상 확인, 그리고 이에 따른 비전과 외교전략의 원칙 제시이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미래 국제질서를 미중 간 극한 대립, 신냉전 체제로 예단하는 것은 현실과 거리가 있다. 20세기 냉전은 진영 내 결속과 진영 간 배타성, 이념 대립이 확고히 정착된 시대였으나, 오늘날의 미중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미중 간 교역량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이고, 각 진영에 속한 국가들도 상대 진영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미중 관세협상의 결과가 어떠한 전반적 변화를 가져올지도 주시해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채 국제질서의 주요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양국 모두 내부적으로 이념적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단순한 이념적 대립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다. 미중 간 갈등은 경쟁과 협력, 갈등과 공존이 병존하는 비선형 구조로 전개되고 있으며, 이를 냉전이라 규정하는 순간 한국은 양자택일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는 정책적으로 오류이며 논리적으로도 근거가 약하다. 물론 미국과 중국이 제3국을 중심으로 대리전 양상을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구조의 문제라기보다는 개별 정책 차원의 현상에 가깝다.
다른 국제질서 전망으로 거론되는 다극체제 역시 쉽게 동의하거나 낙관할 수 없다. 미국은 다극체제 속 미국 우선주의를 언급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의 국가들은 다극화된 세계질서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그 전망은 불투명하다. 세 개 이상의 압도적 강대국이 병존하는 체제는 협력이 아니라 경쟁과 충돌의 경합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실적으로 다극 질서에서 합의된 국제 규범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결과적으로 다극체제는 ‘질서’가 아니라 ‘다극적 무질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며, 이는 전쟁과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과 같은 경계선의 국가는 다극체제 속에 전쟁 방지와 국익 실현이 매우 어려울 수 있으므로 다극화된 질서의 체제수립의 가능성에 대해 낙관할 수 없다.
강대국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극 질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안정된 다극 세계를 말하고, 미국은 다극 세계 속에서도 ‘위대한 미국’을 외친다. 그러나 다극과 안정, 또는 다극과 미국 중심 질서의 병존은 형용 모순일 수 있으며, 다극체제가 오히려 중견국 외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쉽게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외치기에는 다극체제 자체가 평화롭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중 전략경쟁은 단순한 기술 격차나 관세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두 국가가 서로의 체제 취약성(vulnerability)을 누가 더 잘 지키고 방어하는가를 가늠하는 장기적 대결이다. 미국 역시 패권의 재강화와 보통강대국으로의 몰락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세계 공장과 기술굴기의 이미지 사이에서, 부동산 붕괴·청년 실업 등 내부 구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중국은 AI, 전기차, 로봇 등 기술 혁신 분야에서 BYD, 화웨이 같은 선도 기업을 앞세워 ‘희망적 중국’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으나, 동시에 고용 위기, 소비 침체, 부채에 시달리는 ‘암울한 중국’의 현실도 함께 존재한다. 이 양면성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미국은 전략적으로 이중적 중국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낙관이나 비관의 편향 없이 양국 체제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하는 안목이 요구된다.
중국의 기술 발전은 분명하지만, 제조업 고도화 비중은 아직 GDP의 6% 수준이며, 부동산 의존도는 17% 이상으로 여전히 높다. 산업 구조는 바뀌고 있지만 사회보장과 소비 기반 강화를 외면한 성장 전략은 내구성과 균형 측면에서 취약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미국과 중국 모두 내부 체제의 회복력과 구조적 보완 능력에서 성패가 결정될 것이며, 이 경쟁은 기술이 아니라 체제의 지속가능성 그 자체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은 단순한 기술 격차나 관세 싸움이 아니라, 각국이 자신의 체제 취약성을 얼마나 잘 보호할 수 있는가를 놓고 벌이는 장기적인 경쟁이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패권을 회복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중국 또한 내부 위기를 관리하면서 전략적 부상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양국 모두 패권 강화와 구조적 쇠퇴라는 이중의 진로 가능성 앞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향후 경쟁은 어느 국가가 더 빨리 성장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랫동안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회복시킬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은 현재까지의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미중 전략경쟁이 규범과 규칙에 근거하여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의 전략적 공간을 보존하며 긴 호흡으로 상황을 관찰하고 준비하는 신중한 외교전략이 필요하다. 지금은 단기 명분이 아니라, 외교적 유연성과 질서 형성에 대한 발언권을 함께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의 축적이 중요하다.
한국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라 전략적 균형축으로서의 위상을 요구받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자율적 억제 능력을 확보하길 원하면서도, 동시에 미 전략자산의 상시 전개, 확장억제의 지속,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기반으로 한반도를 동아시아 안보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활용하려 한다. 이러한 전략은 한국에게 이중적 부담을 안긴다. 미국의 전략적 조정과 함께, 지역 안보의 실질적 관리 책임이 한국에게 전가되고 있으며, 동시에 동아시아 전반의 긴장 국면에 선제적으로 노출될 위험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도련선 구조속에서 한국은 대만·남중국해·일본과 함께 중국 견제의 최전선으로 위치가 정립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전략적 목표는 미중 간의 국지전을 포함한 전쟁 방지와 외교적 방법을 통한 위기 관리 및 분쟁 해결, 미중 전략 경쟁 속 대북 군사억제력 확보, 한미동맹을 축으로 동북아 군사적 현상유지 및 소다자 안보협력 등 다층적 안보협력 모색 등이다. 미국 중심의 안보질서 유지에 기여하면서도, 자국 방어의 자율성과 국제적 신뢰를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적 분기점에서 정체성과 실용성, 동맹과 생존 사이에서 전략적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의 전략은 더 이상 단일 축이나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복합 연계와 다층 대응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 ■
■ 전재성_EAI 국가안보연구센터 소장.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 담당 및 편집:송채린, 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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