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反日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은 22일 오전,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을 마주 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① 양국관계 ‘현주소’… 한국인이 보는 일본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이끄는 현재의 한·일 관계가 국교정상화 이후 50년간의 역사에서 최악의 수준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이로 인해 오랜 역사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유지돼 왔던 한·일 국민 간의 상호 감정이 근본적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시민사회에서 반일 정서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증거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최근 잇따라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 시민단체 ‘언론 NPO’가 올해 4∼5월 실시한 한·일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72.5%는 일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고 답했다. 최근 KBS 1라디오가 방송문화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인 47.4%가 일본을 싫어하는 편이라고 답했고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10점 만점에 4.76점을 기록, 중국(6.31점)과 러시아(5.62점)보다 낮았다.
특히 아베 총리를 보는 인식은 한층 부정적이다. 지난 5월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은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 총리가 4월 말 미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충분한 사죄 의지를 표명하지 않은 것을 규탄하며 반일 시위를 벌였다. ‘전범 부정’이라고 적힌 욱일승천기를 자르거나 아베 총리의 사진이 붙은 신문지 뭉치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퍼포먼스를 보이는 등 시위 양상도 과격했다. 지난해 아산정책연구원 조사에서는 아베 총리에 대한 우리 국민의 호감도가 10점 만점에 1.11점으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대한 호감도(1.27점)보다 더 낮은 수준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국내에서 반일 정서가 전례 없이 고조되는 현상은 아베 내각에 들어와 본격화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흐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취임 후 과거 한반도 침략역사에 대해 “침략의 정의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등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를 훼손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을 위해 헌법 해석을 변경하고 안보법제 개정을 추진하는 등 군사적 차원에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양기호(일본학) 성공회대 교수는 이 같은 아베 총리의 행보에 대해 “사실상 레드라인을 넘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과거 일본 정치인들이 국내 여론 및 이웃 국가와의 관계 악화를 고려해 생각만 해 왔던 것을 아베 총리는 국민적인 공감대 형성 없이도 대담하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일본과 오랜 갈등의 역사를 지내 온 한국 국민들마저 분노에 가까운 반일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점차 확산하고 있는 반일 감정을 제어할 현실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의 일본 의존도가 약화하면서 반일 감정의 확산을 막을 구체적 이익이 실종됐기 때문이다.
기무라 간(木村幹) 일본 고베(神戶)대 교수는 18일 동아시아역사재단 등이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과거에는 일본이 경제나 안보 면에서 한국에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반일 운동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바로 관계 수복을 위해 움직였지만, 한·일 관계 중요성이 저하된 오늘날에는 이 메커니즘이 기능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시설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아베 총리가 한·일 양국 국민들의 이목이 쏠린 종전 70주년 담화에 충분한 사죄와 반성의 의지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반일 감정은 확대일로를 갈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전문가들은 반일 정서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협력이 필수적인 분야까지 발목을 잡히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반일 정서가 일본에서 불고 있는 비이성적인 ‘혐한 기류’처럼 극단화되는 것은 피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경제, 안보 분야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