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2~23일 경남대 인문관에서는 (사)한국사회학회가 주최하는 '전기 사회학대회'가 열렸다. 총 42개 세션에서 12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토론이 진행된 가운데, 경남에서는 지주형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가 주요 발표자로 나섰다.
지 교수는 지난해 발간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모더니티와 진보 개념에 대한 성찰'을 주제로 한 그의 발표문은 과연 진보란 무엇인지, '진보다운' 진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현실을 근본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과감한 시도로 읽혔다.
지난 5월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이념성향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정한울 센터 부소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 보수는 30% 수준, 진보는 23~28%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 충격 등을 겪으며 19.3%까지 감소했다"고 말했다.
진보의 개념 포기해선 안 돼
그러나 한편에서는 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민주통합당 대선주자인 손학규 상임고문이 내건 '유능한 진보론'이 대표적이다. 만일 진보가 광범위하게 외면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어떤 정치인도 스스로 진보를 표방하는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주형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보가 이렇게 그때그때 다른 평가를 받고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은 "좌·우처럼 고정된 개념이 아닌 상대적이고 역사적이고 변모해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지 교수는 단적으로 이런 예를 든다.
"만약 '진보'란 말이, '진보'를 공공연하게 옹호하지만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고 고정된 관념이나 사상에 집착해 결과적으로 퇴보를 가져오는 사람들이나 집단들에 의해 애용되고 대표된다면 '진보'라는 사상도 함께 사람들에게 의혹과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 자체가 진보일 수 있을까? 그건 또 아닐 것이다. 변화, 도전, 실험 따위가 진보라면 오늘날 가장 진보적인 세력은 바로 '자본'일 것이다.
고정된 이데올로기도, 단순한 변화도 아니고 주체나 시대에 따라 180도 달라질 수 있는 게 진보라면 대체 진보는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아니, 과연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개념이기나 한 것일까?
지주형 교수 역시 "오늘날 무엇이 진보인지는 이전보다 훨씬 덜 분명하다"는 데 공감을 표하지만, 그는 그래도 "진보의 개념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진보를 포기하면 인류 문명의 기초와 방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의 이분법을 넘어
지 교수는 근대 계몽주의 이래 사상의 흐름부터 무한자와 유한자의 변증법적 접근, 동아시아·한국의 역사적·지역적 특수성 등 다양한 관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찾아나간다.
이를테면 "철학에서 무한자란 한계가 없는 것, 즉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와 지식 등을 가리키며, 유한자란 한계가 있는 것, 즉 불완전한 존재와 지식을 의미"하는데, "이 이분법을 넘어서 유한자를 배제하지도, 무한자를 부정하지도 않고 유한자로부터 무한자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계몽적 이성을 진보의 기준과 수단으로 삼는 계몽주의와, 이를 거부함으로써 사회 진보를 사실상 부정하는 보수주의·포스트모더니즘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다고 지 교수는 말한다.
"우리의 대안은 이성을 기준과 수단으로 하되, 그것을 현실적·구체적 삶이라는 맥락에 뿌리박은 이성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주의적 진보의 판별 기준과 달성 수단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비판하며 나아가는 성찰적 합리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큰 틀에서 사유를 거쳐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 즉 한국에서 진보 개념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다. 이로써 도출된 '작은 결론'은 산업자본주의,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민족주의 등은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끌긴 했으나 더 이상 한국에서 진보라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진보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계급갈등, 환경과 생태 파괴, 정치적 소외, 지역의 영토분쟁 등을 이들이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찰적 합리성과 객관적 현실인식
지주형 교수는 나아가 노동계급 중심의 마르크스주의와 부문운동으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도 현재의 모순을 해결할 진보의 동력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회적 억압을 간과하는 경향과 국가주의·경제주의와 결합하는 한계(마르크스주의)를 갖고 있거나 다문화주의, 환경운동 등이 그렇듯 제한적인 해답만을 제공할 뿐(포스트모더니즘)인 탓이다.
지 교수는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을 새로운 대안 제시의 필요성에 공감하나 '일반적인 수준' 이상을 내놓을 수 없는 역량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가 '단초'로나마 언급한 대안은 크게 두 가지다.
미국의 사회철학자인 칼 폴라니가 강조한 "국가도 시장도 아닌 제3의 영역, 즉 우리가 '시민사회'나 '사회적 경제'라고 부르는 영역의 활성화"하는 것.
또 하나는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안으로서, 국가와 시장을 가능케 하는 것들을 탈구축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후자는 자유, 민주주의, 효율성 같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에 대한 담론정치 투쟁 등을 말한다.
지 교수는 끝으로 진보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6가지 명제도 함께 정리·제시했다. 어느 명제 하나라도 크게 못 미치는 부분이 있다면 진보라 부르기 어렵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윤리와 도덕 ② 숙의 민주주의(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합리적 의사소통 등) ③ 맥락의존성(구체적 현실 분석에 기초) ④ 비판(단순 폭로가 아닌 객관적 현실인식에 기반한 균형있는 비판) ⑤ 자기 성찰성 ⑥ 전략과 비전, 그리고 원칙.
이를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진보를 내세우거나 고민하는 개인·세력은 스스로 너무 멀리 나가 있는 건 아닌지 '성찰'에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주형 교수는 "진보는 전략적으로 문명, 즉 인간의 생활양식과 물질문화의 질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