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5일 미국 중간선거가 실시됐다.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3분의 1, 주지사 일부를 뽑는 선거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처음으로 시험대에 오른 선거여서 전국적 관심이 컸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10월 31일부터 11월 3일까지 나흘간 전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미국인 1221명이 대상이었다. 이 중 투표장에 갈 거라고 답한 715명 중 51%가 공화당, 45%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걸로 나타났다. 4%는 부동층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전국 435개 선거구의 투표 결과가 집계됐다.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여론조사 내용과 일치했다. 투표자 7500만여 명 중 51.7%가 공화당 후보, 45%가 민주당 후보를 택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예측이었다.
갤럽·조그비 등이 언론사와 공동으로 실시하는 미국의 선거 여론조사는 높은 정확도를 자랑한다. 전국 단위 여론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36년이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을 만든 조지 갤럽이 수천 명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선을 정확히 예측했다. 이후 70년 넘게 미 여론조사기관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과학적 조사기법을 구축해왔다. 대표적인 게 표본 추출 방식이다. 갤럽 편집장 프랭크 뉴포트는 2004년 낸 저서 여론조사에서 “여론조사에서 중요한 건 표본 크기가 아니라 추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실시 초기엔 할당표본추출(quota sampling)을 했다. 성·연령·지역·인종 등 범주에 할당된 수를 채우는 것이다.
갤럽은 48년 대선에서 이 방법을 써 공화당 듀이 후보가 민주당 트루먼 후보보다 우세하다고 자신했다. 시카고 트리뷴을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이 갤럽 조사를 인용 보도했다. 하지만 개표 결과 듀이는 참패했고 갤럽은 망신을 당했다. 할당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나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많이 포함됐기 때문이었다. 이후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에선 무작위 표본추출(random sampling)을 한다. 복권 추첨이나 제비 뽑기와 같은 원리로 대상을 정하는 방법이다.
가령 전화조사의 경우 무작위 전화통화 방식(RDD·Random Digit Dialing)을 기본으로 한다. 전화번호에서 지역번호와 국번호를 제외한 마지막 부분 숫자들을 무작위로 고른다. 이런 식으로 표본을 정한 후엔 응답을 얻을 때까지 3∼5회 정도 반복적으로 통화를 시도한다. 오늘 낮에 통화가 안 됐으면 밤에, 그때도 안 되면 다음 날 다시 전화를 건다. 모집단의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쓰는 방법은 또 있다. 소위 ‘키시 그리드(Kish grid)’라고 불리는 조사방법이다. 전화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해당 가구에 사는 성인을 연령별로 파악한 후 ‘가장 최근 생일을 맞은 사람을 바꿔달라’는 식으로 지정해 조사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가능한 건 조사기간과 비용이 한국에 비해 여유가 있어서다. 의뢰인 요구에 맞춰 하루 만에 결과를 내야 하는 우리와 달리 조사기간이 최소 사나흘이다. 기간이 늘어난다는 건 비용이 올라간다는 뜻한다. 응답률에서도 차이가 난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 부소장은 “전화 조사를 기준으로 우리는 응답률이 보통 10~25% 정도다. 미국은 60%까지 나올 정도로 조사를 꼼꼼히 한다. 한국 여론조사 비용은 미국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결과가 실제와 자주 맞아떨어지는 이유는 또 있다. 미 국민의 성향이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미국은 토론 문화가 발달한 데다 국민이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는 데 스스럼이 없어 설문조사에도 솔직하다”고 말했다. 한국과 미국의 제도적인 차이도 정확성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준다. 윤 실장은 “미국은 유권자 등록제도가 있어서 조사 전에 등록 여부나 지난 선거에서 몇 번이나 등록했는지를 알 수 있다. 투표에 참여할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 조사에 많이 응하게 되니 결과가 좀 더 정확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선거일 바로 전날까지도 조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어 바뀐 민심을 좀 더 민감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점도 미국 여론조사의 신뢰도를 높이는 한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