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朴風 흔드는 20대의 安風

  • 2011-10-16
  • 이철희 (주간조선)

분노. 한 정당에서 실시한 표적집단면접(FGI) 조사에서 드러난 민심의 키워드 중 하나다. 광범위한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정부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를 내건 미국 젊은이들의 시위처럼 직접 행동으로 나서고 있지는 않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분출 직전의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불만. 같은 FGI 조사에서 드러난 또 하나의 민심 키워드다. 많은 사람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성’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정당을 포함한 기성체제 전반에 대한 불만은 ‘기성’의 무관심 내지 무능이 고단한 현실의 원인이라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으레 그렇듯 분노와 불만은 변화의 추동력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면, 또 지금의 그들에게 기대할 게 없다면 새것에서 희망을 찾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흔히 ‘안철수 현상’으로 불리는 흐름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면 간명하다. 이와 같은 새로움(new-ism)에 대한 갈망은 젊은 세대의 문화적 유행이 아니라 차별과 빈곤이라는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른 것이다.

 

사실 분노와 불만은 같다. 현상(status quo) 내지 기성(establishment)에 대한 거부다. 반(反)기성을 지탱하는 힘은 20~30대 젊은층이다. 최근 각종 선거에서 이들은 일종의 투표행동주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한국 정치, 한국 사회의 지형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아직도 거센 안철수 바람

 

미국 정치의 오랜 속설 중에 이런 게 있다. “젊은층에 표를 호소하는 후보의 다른 이름은 패자(loser)다.” 젊은층은 투표장에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서 아무리 높은 지지를 받더라도 선거에서 표로 카운트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20~30대는 유권자 중에서는 높은 비중이나 투표자로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다. 18대 총선을 기준으로, 19~39세 유권자의 수는 전체 대비 43.1%를 차지한다. 그러나 투표자 수로 보면, 29.9%에 불과했다. 반대로 50세 이상의 경우, 유권자 기준으로는 34.3%였으나 투표자 기준으로는 46.7%다.

 

예외는 있었다. 2002년 대선이 그렇다. 그 해 선거에서는 젊은층이 대거 투표장에 몰려나왔다. 20대는 50%대 중반, 30대는 60%대 중반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2007년 대선의 경우, 20대는 40%대 중반, 30대는 50%대 중반에 그쳤다. 20~30대의 투표율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던 셈이다.

 

지난 9월 1일 저녁 9시30분 오마이뉴스를 통해 확인했던 안철수 돌풍은 여전히 거세다. 단숨에 대권후보 지지율 2위로 솟구쳤다. 한바탕의 바람이 한창일 때는 부동의 1위 박근혜를 2위로 밀어내는 기세를 보이기도 했다. 거품이 어느 정도 빠진 지금도 그의 높은 지지율은 야권의 타 후보를 난쟁이(dwarf)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안철수 지지층의 주력은 20~30대다. 동아시아연구원의 9월 조사에 따르면, 박근혜와 안철수가 맞대결할 경우 20대와 30대의 안철수 지지율은 각각 59.6%, 60.8%다. 40대의 46.6%에 비해 현격하게 높은 수치다. 안철수의 등장 이전만 하더라도 20~30대의 강자는 박근혜였다. 그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 7월 조사에서 20대와 30대에서 각각 41.5%, 30.9%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20대에서 2위 유시민이 받은 지지율은 10.7%, 30대에서의 2위 손학규가 받은 지지율은 12.2%였다. 상당히 큰 격차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견고한 박근혜 현상

 

안철수 현상 이전에 박근혜 현상이 있었다. 박근혜 현상은 막강했다. 단순히 지지율만 앞선 게 아니라 신뢰의 기반도 굳건했다. 예컨대 세종시 수정이 논란이 됐을 때 여론은 수정론에 대한 찬성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중에서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느냐는 질문에는 박근혜를 꼽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실 바람이 일으키는 먼지를 걷어내고 보면 박근혜 현상은 안철수 현상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40% 선의 안정적 지지율로 떡 버티고 있다. 영남과 보수라는 큰 덩치가 뒷받침하고 있는 데다 기존 정치인과 다른 ‘탈정치’의 스탠스를 취하는 전략도 여전히 먹혀들고 있다. 생애맞춤형 복지정책 등을 제시함으로써 수구적 보수에서 개혁적 보수로 변화하는 모습을 연초부터 보여준 것도 안철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박근혜의 지지기반은 쉽게 흩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지율도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세대별로는 50세 이상에서, 지역적으로는 영남과 충청에서 튼튼한 지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야권에서 강한 상대가 등장하면 진영논리에 따라 보수 쪽에서 박근혜로 결집되는 정도도 강해질 것이다. 안철수의 지지기반을 보면 진보를 주축으로 하고 여기에 중도층이 가세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분명한 야권후보다. 따라서 여권에서 박근혜 외에 대안이 마땅치 않다는 사정도 박근혜 현상을 지속하게 하는 요인이다.

 

문제는 20~30대의 동향이다. 2002년처럼 이들이 대거 투표장에 몰려나온다면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과연 이들이 투표장에 몰려나올까? 20~30대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안철수는 얼마 전 주간조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년에 선거 참여율이 굉장히 높아질 것이다. 20~30대 투표 참여율이 50%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지금 20~30대가 전체 인구 중 비중이 가장 크다. 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달라진다.” 그는 누가 자신의 운명을 쥐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박근혜 발목 잡는 ‘MB 스트레스’

 

젊은이들이 투표를 많이 할 것으로 보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둬서 고통을 당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많이 퍼져 있는 것 같다.… 전국 강의를 하면서 들어보면 그전에 별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도 조금씩 바뀌고 있는 듯하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분노와 불만, 그리고 새로움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그들의 정서를 안철수는 정확하게 짚고 있다.

 

젊은층의 투표 참여, 즉 투표행동주의(vote activism)가 정치지형을 바꾼 예는 앞서 언급한 2002년 노무현 대선과 2008년 미국 대선이 대표적이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후보가 20~30대의 지향과 정서에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노무현이나 오바마의 스타일, 메시지는 젊은층의 기호에 소구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경쟁후보는 ‘꼰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신구 대결구도가 젊은층으로 하여금 투표장으로 몰려나갈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안철수는 시대흐름을 잘 체현하고, 또 상징하고 있다. 그 자체로 성공모델이면서도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공유하는 삶,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냐 보수냐 하는 낡은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청춘콘서트’와 같은 형식을 통해 계속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해왔다. 한마디로 변화의 아이콘으로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박근혜의 경우에도 식상한 것은 아니다. 제법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새로움의 요소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낡은 것과 새것의 대결 구도가 선명하게 예각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당이다. 한나라당이 낡은 정당의 이미지에 고착되어 있으면 박근혜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특히 광범위한 민심이반을 초래한 현 정권의 실정을 감안하면 박근혜가 져야 할 부담, 이른바 ‘MB 스트레스’는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안철수에게도 고민은 있다. 기성정당의 지원 없이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다른 한편 기성정당의 틀 속에 편입되면 안철수 현상이 품고 있는 대중적 에너지는 소멸될 것이다. 해법은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이 대대적 혁신과 함께 통합하는 재편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과 인물의 상생적 결합이 가능할 것이다.

 

10·26 서울시장 선거가 첫 대결무대

 

노무현이나 오바마의 성공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후보와 젊은층을 연결해준 미디어의 존재다. 노무현의 경우엔 인터넷이 있었고, 오바마의 경우엔 페이스북·마이스페이스·유튜브 등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있었다. 안철수에겐 SNS가 있다. 엘리 프레이저(Eli Parisa)의 책 ‘The Filter Bubble’(‘생각의 조종자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에 따르면, SNS는 비슷한 무리들끼리의 소통을 강화시킨다. SNS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감안하면 SNS는 안철수 현상을 전파하고 유지시켜주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점에서는 박근혜가 상대적으로 열세다.

 

오바마의 2008년 친청년 캠페인(youth-oriented strategy)을 지켜본 저명 정치학자 러셀 달톤(Russell Dalton)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오바마) 캠페인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젊은층 동원을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젊은 참여시민들에게 소구하는 이슈를 제기하고, 정치적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젊은층의 이해와 관련된 이슈를 담아내고, 그것을 그들의 용어로 표현했다. 그럼으로써 젊은층의 선거 무관심이 TV와 팝 문화의 대중매체에 의해 길들여진 세대의 본질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과거 캠페인의 성격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근혜와 안철수는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 맞붙을 수밖에 없다. 박근혜는 이미 선거에 개입할 뜻을 밝혔다. 안철수는 아직 가능성의 여지만 남겨놓을 정도로 소극적이다. 하지만 사실 안철수가 나서든 안 나서든 둘의 대결은 불가피하다. 박근혜 현상과 안철수 현상이라는 객관적 두 흐름이 격돌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기선은 안철수 현상이 잡았다. 야권 단일후보 경선에서 보여준 젊은층의 투표열기는 변화를 바라는 대중적 열망의 강도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의 선거 개입은 이러한 대중적 열망이 계속 확장되지 않도록 차제에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일 것이다. 적절한 선택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패는 장담하기 어렵다.

 

박근혜의 등장으로 선거전의 성격이 회고적 투표에서 전망적 투표로 바뀌느냐가 관건이다. 또 박근혜 변수로 인해 보수가 결집하는 만큼 진보나 젊은층도 투표 행동에 나설 동기가 그만큼 강해질 것이다. 특히 박근혜가 정당 대 시민, 기성 대 변화의 구도로 선거를 치르려 한다면 젊은층의 열기는 더 고조될 것이다. 박근혜의 개혁보수 노선이 이번에 얼마나 중도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지도 관심거리다.

 

이제 10·26 서울시장 선거와 더불어 총선·대선의 승부가 시작됐다. 양 진영 모두 숱한 고비와 곡절을 겪을 것이고, 환호와 절망의 드라마로 밤을 지샐 것이다. 승자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성패의 요체는 칭기즈칸이 말해준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할 것이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할 것이다.’

 

이철희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