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식 정보’ 탈피 ‘선택과 집중’을
"잃어버린 10년’은 지난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보수층을 결집하기 위해 내건 구호다.
이 구호는 선거전 당시에도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지 6개월이 된 지금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야당의 선거 구호라면 몰라도, 집권 반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잃어버린 10년’을 되풀이하며 전(前) 정권 탓을 하는 것은 오히려 볼썽사나운 책임 회피로 비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조직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국가정보원이다. 지난 10년은 국가정보원의 영향력 쇠퇴 10년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정 운영의 원리로 보면, ‘민주주의의 제도화’와 ‘권력기관의 제자리 찾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직의 논리로 보면 ‘힘 빼기’와 ‘영향력 감소’로 나타난 것이 사실이다.
‘정치중립’ 문제는 어느정도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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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2005년부터 시작된 중앙일보-동아시아연구원(EAI)의 25개 파워집단 영향력과 신뢰도 공동조사에 따르면, 이른바 ‘4개 권력기관’ 중에서 국정원은 지난 4년간 유일하게 한 번도 영향력 10위권 안에 진입하지 못한 채 14~18위를 맴돌았다. 반면에 검찰(5~7위)과 국세청(8~10위) 그리고 경찰(6~10위)은 지난 4년간 한 번도 영향력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 교체의 관성에 따라 국정원에 개혁의 칼을 대는 것은 오히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위험이 크다. 또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꿰뚫고 있는 정보기관의 속성상 국정원은 정권 교체기마다 다른 어떤 국가기관보다 스스로 살을 베는 개혁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21세기 선진정보기관을 염두에 둔 최초의 중장기 개혁안인 노태우 정부 말기의 ‘21세기 국가안전기획부 발전계획’과 김영삼 정부 초기의 ‘선진정보 5개년 발전계획’ 등이 모두 상당한 수준의 자기혁신 플랜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혁신을 해도 자기 살을 깎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국정원은 지난 10년간 세 가지 충격적인 사건을 거쳐 개혁의 토대를 닦았다.
우선 ‘정권 교체가 최고의 개혁’이라는 슬로건이 현실화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정권 안보’를 ‘국가 안보’와 동일시해온 정보기관에 최고의 개혁은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37년 만에 처음 겪는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이들에게는 100번 정치적 중립 의무를 강조하는 것보다 한 번의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더 위력적이었다.
더욱이 새로운 정권의 주인은 중정 시절인 1971년 대선 때부터 과격·용공분자로 덧칠하고, 미감(미행감시)을 밥 먹듯이 하고, 심지어 이웃나라 수도에서 백주대낮에 납치해 수장까지 하려던 ‘요시찰 정치인’이었다. 노련한 정치인이자 ‘준비된 대통령’인 DJ는 ‘조용한 개혁’을 원했다.
그러나 ‘제발 저린 도둑’들은 지은 죄를 감추고 구명하는 것을 넘어 협박까지 감행했다. 이른바 ‘이대성 파일’로 돌출된 북풍공작 사건은 그런 상황에서 불거진 것이다. 이로 인해 불법 정치공작에 연루된 전직 안기부장부터 6급 직원까지 줄줄이 구속되었다. ‘정권 안보’를 ‘국가 안보’와 동일시한 안기부맨들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라는 특수 상황과 맞물려 조직 개편을 단행해 11%의 인원을 감축했다.
두 번째 충격은 노무현 정부에서 불거진 ‘국정원 도감청 사건’이다. 도감청 사건은 삼성 녹음테이프에서 불똥이 튄 과도기적 사건으로 공소시효 때문에 전직 원장들만 애꿎게 사법처리됐으나 불법을 묵인만 해도 더는 조직이 개인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세 번째 충격은 노무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비전 2005’라는 혁신안을 추진해온 김만복 국정원장이 아프가니스탄 인질 협상장에 ‘선글라스 맨’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참여정부하에서 국정원은 민주적 절차와 인권 중시 업무 관행 등을 정착시킴으로써 소위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라는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벗어났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김만복 원장이 짠~ 하고 나타나면서 인질을 석방하기 위해 물밑에서 일해온 국정원의 역할은 사라지고 원장의 행태만으로 국민의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국정원장 임기 보장 등 고민해야
더욱이 김 전 원장은 대선 직전의 비밀 방북으로 의혹을 초래하더니 급기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간의 대화록을 유출하는 ‘사고’까지 쳤다.
그러고 보면 국정원 개혁의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정치적 중립과 불법적 업무관행 근절 그리고 비밀정보기관으로 복귀가 그것이다.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답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 뿐이다.
이 가운데 정치적 중립과 불법적 업무관행 근절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과거로 회귀한다는 우려도 있지만 인터넷 환경은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순수한 비밀정보기관으로 복귀다. 사실 국정원 2차장 관할인 국내 파트는 더 이상 비밀정보기관이 아니다. 오픈된 조직은 행정기관이지 정보기관이 아니다.
또 정보 환경은 엄청나게 변했는데 정보 수집과 생산방식은 여전히 그대로다. 사실 어지간한 정보는 인터넷이 정보기관보다 빠르다. 따라서 국정원이 모든 정보를 백화점식으로 수집·생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역대 모든 정권은 백화점식으로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
당선자 시절과 취임 초기에 대통령은 모든 부처와 기관의 업무보고를 받는다. 이 가운데 대통령의 눈과 귀를 잡아끄는 보고서는 단연 국정원의 종합보고서다.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집권 5년 청사진을 담은 종합보고서를 받고서 국정원이 대단한 조직이라는 첫인상을 갖게 된다.
‘종합보고’ 기능을 가진 기관은 국정원밖에 없다. 다른 기관의 정보 보고와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은 자연히 종합보고를 원한다. 종합 보고를 하려면 백화점식으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정보 환경은 변했는데 정보 수집과 생산방식이 그대로인 채로는 국익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정원이 백화점식 정보 수집을 탈피하려면 종합 보고 기능을 총리실에 넘기면 된다. 총리실 산하 국정상황실에는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군이 파견돼 있어 종합 보고가 가능하다. 대신 국정원은 국익을 기준으로 정보를 수집·생산하는 데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이제는 국정원장도 검찰총장처럼 임기를 정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때다. 국정원법을 개정해 원장 임기를 보장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원장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 미국처럼 정보공동체 관한 규범을 정해서 국가정보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전문가가 정보공동체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밀정보기관의 장애물이자 관료주의 확산의 온상인 국내 지부를 과감히 없애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자국민을 상대로 오픈된 정보활동을 하는 것은 이미 비밀정보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