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경향의 눈] 美 대선과 북·미 시간싸움

  • 2008-07-07
  • 이승철 (경향신문)
[경향의 눈]美 대선과 북·미 시간싸움

 

또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8년 전에도 그랬다. 2000년 7월, 본격적인 미국 대통령 선거전을 앞두고 북한과 미국은 빈번한 접촉을 가졌으나 결국 시간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다시 시간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북·미 양측을 보면서 솔직히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만 8년 전 북·미간에 있었던 일을 복기해보자. 그해 6월 김대중 대통령-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는 7월10~12일 미사일 회담(쿠알라룸푸르), 7월28일 사상 첫 양국 외무장관 회담(방콕), 8월9~10일 테러 회담(평양)을 가졌다. 겉보기에 북한과 미국 사이에 많은 대화가 있었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었지만 클린턴 미 행정부가 소극적이었던 것이 원인이다. 임기말의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여름 미국의 최대 관심사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회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최근 성 김 국무부 한국과장의 방북과 북한의 핵 신고, 냉각탑 폭파 등 각종 이벤트가 잇따라 벌어졌다. 또 이번 주 6자회담이 재개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2000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기싸움만 있을 뿐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이번에는 북한이 여유를 갖고 있는 반면 임기말의 부시 행정부가 다소 적극적인 것이 과거와 차이라면 차이다.

美정권 바뀌면 ‘한반도’ 또 뒷전

그러면 앞으로 북한과 미국의 줄다리기는 어떻게 될까. 8년 전은 북한의 2인자였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함으로써 클린턴 행정부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조 차수는 10월12일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적대시 정책 포기를 약속받았다. 8년이 지났지만 조그만 몸짓의 조 차수가 국무부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백악관으로 향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미국 대선 직전인 11월초 방북한 데 이어, 외교적 업적에 목말랐던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행을 만지작거렸으나 임기말 대통령의 외교 행보에 비난 여론이 쏟아지면서 이를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보는 대로다. 2000년 대선에서 이긴 부시 대통령은 한동안 대북정책 재검토를 명분으로 북한과 대화를 중단했다. 뒤늦게 북·미가 6자회담이란 다자 협의기구를 구성해 북한과 직·간접 대화를 하고 있으나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관계개선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8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냈다.

작금의 북·미간 기싸움이 걱정스러운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미국 대선이라는 변수를 앞두고 북·미가 벌이는 기싸움이 본질적으로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이른 시간 내에 북한 핵문제와 북·미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 누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더라도 일정기간 잠복 상태에 빠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에서 긴급한 현안이 없는 한 한반도 문제는 항상 외교 순위에서 뒷전에 밀리기 때문이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은 지난 주 서울에서 동아시아연구원(EAI) 주최로 열린 한 세미나에서 “미국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한국이 아니라 중동문제가 큰 이슈가 될 것”이라며 이 점을 우려했다.

北도 南도 시간 낭비 안타까워

그래서 안타깝다. 특히 북한이 미국의 허약한 입장을 이용하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북한은 이미 미국에서 정권 교체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겪은 마당이 아닌가. 지금은 이라크전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진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지만 대선이 끝나면 최소한 얼마 동안은 그 분위기가 180도 바뀔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도 하는 짓이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북·미가 우리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시간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6자회담만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남북 모두 여태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승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