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민주화 이후에도 살아남은 ‘대중동원의 신화’

  • 2008-07-24
  • 김선혁 (중앙일보)

EAIㆍ하버드 유럽학연구소 시민사회 데이타뱅크 구축 프로젝트
집회시위로 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정치는 ‘생물’이라고들 하는데 집회·시위 역시 생물이다. 한국의 집회·시위는 전문가들마저 당혹하게 하는 속도로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촛불시위는 주체도, 지도부도, 일정한 형식이나 의제도 없고 분명한 종결도 예정되어 있지 않은 역사적 실험이다. 당연히 해석이 분분하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촛불시위를 아전인수격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나 배척당했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에서 집회·시위는 일상화·대중화·보편화되었다. 집회·시위는 희생을 각오하고 떠나는 전장이 아니라 시민의 의견과 이익과 열정을 표출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다.

 

이번 동아시아연구원(EAI) 연구 결과는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집회·시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집회·시위가 차지하는 위치는 남다르다. 대중 동원은 한국에서 권위주의 해체와 민주주의로의 이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대규모 집회·시위의 경험이 ‘추억’이 되어버린 많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 대중 동원의 신화는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현재형이다.

 

하지만 집회·시위의 양태와 방식에 의미심장한 변화도 관찰되고 있다. 거리시위가 늘고, 시위의 주체가 변하고, 제도 정치에서의 불평등은 비통상적 시위 정치에도 재생산된다. 정치적 성격의 대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대규모·장기·불법 시위가 유효하다는 것이 ‘근거 있는’ 속설이며, 조정과 협상은 여전히 부족하다.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에서 집회·시위의 진정한 가치는 과소 평가와 과대 평가 사이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집회·시위가 정당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도 정치의 정상화만을 교과서적으로 되뇌기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고 집회·시위가 가진 역사적 무게가 버겁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자기 혁신하는 한국의 집회·시위를 백안시하거나 이상화하기보다는 겸허한 자세로 성찰하고 시민사회의 열정을 제도화해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알차게 일궈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김선혁 고려대행정학과 교수. EAI 민주주의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