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경향신문·메릴랜드大·EAI국제여론조사-(1)인종 차별
경제 이해관계 얽히면 배타성 ‘이중 태도’
저소득·저학력 과반 “외국인 일자리 반대”
한국은 인종·민족 평등의 중요성을 인식하면도 다른 인종과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얽히면 배타성을 드러내는 등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조사는 유엔인권선언 60주년을 기념해 경향신문이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국제여론조사 기관인 세계여론네트워크(WPON)·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EAI)과 공동으로 실시한 국제인권의식 여론조사 결과 밝혀졌다. 20일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전 세계에 공개된 이 조사는 러시아·영국·우크라이나·프랑스, 중국·인도·인도네시아·한국, 미국·멕시코, 아제르바이잔·이란·터키·팔레스타인·나이지리아·이집트 등 5대륙 16개국에서 2008년 1~2월에 걸쳐 실시됐다. 95% 신뢰수준에 최대 ±4% 오차범위다.
5대륙 16개국 조사
◇“차별 개선” 응답 낮아=16개국 1만4896명이 설문에 참여한 결과 인종·민족평등이 중요하다고 한 응답이 평균 90%에 달했다. 한국 응답자의 94%도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영국(97%), 미국(96%) 등 인종 평등 의식이 높은 서구 선진국은 인종차별 개선 체감도 역시 각각 79%, 82%로 높았다. 한국은 71%였다. 그러나 세부 내용에서 차이가 있다. ‘매우 개선됐다’가 4%로 16개국 가운데 최저치였다. 경향신문·WPON·EAI가 별도로 실시했던 ‘양성 평등’ 관련 설문조사에서도 “양성차별 해결이 매우 중요하다”는 응답이 43%로 세계 평균(59%)에 못 미쳤고, “여성 차별이 매우 개선됐다”는 반응 역시 23%에 불과했다. 이 같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정부가 나서서 메워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16개국 국민의 79%가 찬성 의사를 밝혔다. 정한울 EAI 여론분석센터 부소장은 “한국은 주요 사회 문제의 해결 책임주체로 정부를 꼽는 성향이 강한데, 인종차별 문제에서도 응답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96%)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고용차별 허용 높아=한국인은 인종차별 철폐의 중요성이나 정부 개입을 인정하는 비율은 조사국 중 수위를 다투지만, ‘고용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인색한 응답을 내놨다. “고용주가 인종·민족을 이유로 고용을 제한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한국 응답자의 41%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세계 평균 19%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이내영 EAI 여론분석센터 소장은 “고용시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여론이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보다 더 많기는 하지만,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이 10명 중 4명에 이른다는 결과는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고용시 인종차별을 정부가 개입해서 막아야 하냐”라는 질문에 한국인은 53%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앞서 정부 개입을 요구하던 태도와 사뭇 다르다.
◇세대·계층별 다양한 차이=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 및 계층별로 ‘고용과 인종문제’에 대한 뚜렷한 인식 격차가 확인됐다. 20, 30대가 고용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은 반면, 40, 50대 이상일수록 차별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다. “고용시 인종 차별을 허용해야 하는가”는 질문에 20, 30대는 32%가 ‘그렇다’고 응답했고 40대는 44%, 50대 이상은 50% 이상이 동의했다.
학력별로 같은 질문에 대한 응답을 분석해보면 대학 재학 이상의 36%만 인종차별에 찬성한 반면, 중졸 이하(55%), 고졸(51%)은 과반수가 인종차별에 동조했다. 소득계층으로 볼 때는 월소득 100만원 미만의 저소득계층 과반수가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답했다.
◇저학력·저소득 차별 용인=정한울 부소장은 “결국 인종차별 문제에 비토 의사를 갖는 층은 주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의 일자리 경쟁에 직접 노출된 저학력·저소득·고령 노동층에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정 부소장은 “이는 고용문제에 관한 한 인종차별의 문제가 자신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상충할 경우 인종차별을 철폐하자는 당위적인 인식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현실적인 사고가 혼재돼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계층별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격차가 심화되고 나아가 폐쇄적인 인종차별 관행을 고수할 경우, 국제인적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세계화 시대에 심각한 사회문제일 뿐만 아니라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미 국제 사회는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인종차별적 요소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지난해 8월 보고서를 통해 “한국 사회가 스스로 단일민족 신화에서 벗어나 다민족적인 성격을 가진 사회라는 것을 인정하고, 제도 및 법적 정비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인권 개선’ 네가지 유형…英美 인식·현실 엇비슷
세계 16개국이 ‘인권’이란 사회적인 의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얼마나 개선했는지에 대한 인식차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선도형 유형이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인종차별 철폐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면서 현실에서 크게 개선되고 있다는 인식도 상대적으로 높은 경우다. 이들 국가는 인종차별을 위한 정부 역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비율이 높지만(80% 이상), 정부 역할을 현재보다 확대할지에 대해서는 미국 45%, 영국 54%만 찬성 의사를 보였다.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문제 해결 능력 쪽에 무게를 싣는 모습이다.
둘째, 국민들이 인종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강도는 약하지만 이 문제들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 믿는 경우다. 갈등이 사전에 예방되고 있는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이란이나 인도의 경우가 이 유형에 속한다.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는 인도는 인종 평등 문제를 중요하게 보는 응답자 비율이 59%로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장 낮았고,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응답도 46%로 조사국 중 최저치였다. 반면 인종 차별이 ‘많이 개선됐다’는 응답은 한국(4%)의 7배인 27%에 달했다. 극우민족주의자들의 외국인 대상 테러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러시아도 인종차별 철폐에 대한 인식이 약했지만, 개선되고 있다는 믿음이 강했다.
셋째, 인종 평등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현실에서의 개선 정도는 오히려 낮은 국가 유형이다. 한국을 비롯해 멕시코·프랑스·나이지리아·팔레스타인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들 국가는 높은 기대 수준에 못 미치는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정부 개입에 매우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인종 평등 실제 체감도도 떨어질 뿐 아니라 실제 개선된 정도도 미약하다고 보는 인식이다. 현실에서의 개선 정도에 대한 불만이 있지만 이를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는 강도도 약해 잠재적인 불만이 사회적 갈등으로 직접 표출되지는 않는 잠복형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인종 차별 이슈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답한 비율이 71%인 반면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되었다는 응답이 4%에 불과하여 인식과 현실의 괴리가 매우 큰 국가로 나타났다. 다문화 가정 등이 중요한 사회 갈등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