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외교 리더십은 관심 정도에 따라 집행형과 합의형으로 나눌 수 있다.
외교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갖고 임기를 시작한 대통령은 외교시스템을 자신의 비전을 집행하기 위한 체제로 조직한다. 집행형은 대통령 참모진 가운데 제2인자가 있고 그를 중심으로 정책이 조정, 집행된다. 대표적 사례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다.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 안보보좌관과 함께 월남전 철수, 중국과의 국교 수립, 소련과의 데탕트 등 역사적인 외교정책을 치밀하게 추진했다. 닉슨과 키신저 모두 확고한 비전과 전략을 가진 외교 전략가였다.
한국의 경우 김대중 대통령이 집행형 모델과 가장 근접했다. 취임 전부터 "3단계 통일론"을 주장했고, 이 모델에 따라 임기 중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추진했다. 닉슨이 키신저에 의존했듯이 金대통령도 임동원(林東源)특보 중심으로 햇볕정책 추진체계를 수립했다.
합의형 대통령은 뚜렷한 세계관이나 비전없이 수시로 발생하는 현안과 여론의 변화에 따라 대응하는 수세형이다. 의사결정도 보좌진의 토론과 논쟁을 통해 합의점을 찾도록 조정한다.
레이건 대통령이 전형적이다. 레이건은 외교정책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지만 보좌진의 합의를 고집해 국정 난맥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와인버거 국방장관.슐츠 국무장관 등이 서로 협력하기 어려운 강성인물이었고, 대통령 자신이 안보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했다.
남북관계 고비때마다 밀사가 "주연같은 조연"
이후락(李厚洛)·장세동(張世東)·박철언(朴哲彦)·서동권(徐東權)·임동원(林東源)….
평양을 찾았던 대통령의 대북 밀사들이다.정상회담을 위해 뛰었던 조연들이다. 6共 때 박철언 전정무장관을 제외하면 각 정권마다 국가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였다.
대북 밀사는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 대통령이 불가피하게 측면이 있었다.하지만 통일방안이나 대북지원의 투명성과 관련해 그때마다 논란의 대상이 됐다.
남북간 밀사 교환은 1972년 5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두차례 면담하면서 시작됐다.이어 북한의 박성철 당시 부수상이 같은 달 서울을 답방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5공 때는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담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밀사역할을 했다.許비서는 85년 9월 “각하(전두환 당시 대통령)와의 평양 상봉이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는 金주석의 친서를 갖고 서울을 방문했다.
두달 뒤 張부장과 박철언 당시 청와대 특별보좌관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으나 정상회담 성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김영삼 정부 때인 93년에는 밀사가 아닌 특사교환도 논의됐다.북한 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고위급 회담 개최를 위한 대표접촉을 갖자고 제의하자 북측은 남북 정상간 만남과 현안해결을 위한 특사 교환을 역제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93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실무접촉이 진행됐지만 북한 박영수 대표단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특사교환은 무산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베를린선언’에서 남북합의서 이행을 위한 당국간 특사교환을 촉구했다.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한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베를린 선언 직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비밀리에 만나 같은해 6월의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산파 역할을 했다.
그해 5월엔 임동원(林東源)당시 국가정보원장이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했다.
◇ EAI프로젝트 참여 교수=박세일(朴世逸.서울대.위원장),김병국(金炳局.고려대.간사), 김판석(金判錫.연세대), 모종린(牟鍾璘.연세대), 박재완(朴宰完.성균관대), 염재호(廉載鎬.고려대), 이홍규(李弘圭.한국정보통신대), 장훈(張勳.중앙대), 정종섭(鄭宗燮.서울대), 최병선(崔炳善.서울대),황성돈(黃聖敦.외국어대)
◇ 토론 참석자=강경식(姜慶植.전 대통령비서실장), 강봉균(康奉均.전 재경부장관), 김경원(金瓊元.사회과학원장), 김영수(金榮秀.전 문화체육부장관), 김정렴(金正濂.전 대통령비서실장), 김충남(金忠男.전 대통령사정비서관), 노재봉(盧在鳳.전 총리), 박철언(朴哲彦.전 정무장관), 사공일(司空壹.전 재무부장관), 이종찬(李鍾贊.전 국정원장), 이홍구(李洪九.전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