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選擧外之選擧(선거 밖의 선거)’
| 2007-12-10
하영선
학기 말이다. 한국근대국제정치론 대학원 세미나 마지막 시간에 100년 전 청나라의 대표적 지식인인 량치차오(梁啓超)의 글을 함께 읽었다. 그의 글들은 당시 우리 지식인들에게도 베스트셀러였다. 19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친 파도 속에서 당시 동아시아 3국의 지식인들은 어떤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는가를 꼼꼼히 따져 보려고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한국의 유길준(兪吉濬)에 이어 중국의 량치차오를 만난 것이다.
학기 말이다. 한국근대국제정치론 대학원 세미나 마지막 시간에 100년 전 청나라의 대표적 지식인인 량치차오(梁啓超)의 글을 함께 읽었다. 그의 글들은 당시 우리 지식인들에게도 베스트셀러였다. 19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친 파도 속에서 당시 동아시아 3국의 지식인들은 어떤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는가를 꼼꼼히 따져 보려고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한국의 유길준(兪吉濬)에 이어 중국의 량치차오를 만난 것이다.
량치차오는 ‘世界外之世界(세계 밖의 세계)’라는 짧은 글에서 제갈공명의 말을 빌려 시대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야 할 기본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제갈공명은 정신없이 공부하고 있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세계가 어려울수록 세계 안의 세계에 머물러서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세계 밖의 세계에 서서 시세(時勢)와 처지(處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세계 속의 바람직한 자기 위치를 찾으라는 것이다. 친구들의 작은 공부가 시세를 따를(隨) 뿐이라면 자기의 큰 공부는 시세를 만들(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막판으로 접어들었다. 선거가 혼탁해질수록 눈앞의 승패에 눈이 어두워 후보와 유권자 모두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미를 놓치기 쉽다. 이번 선거는 세기의 결전이다. 한반도의 21세기 국운이 달렸다는 얘기다. 우리가 서 있는 동아시아 무대에서도 ‘선거 밖의 선거’가 치열하게 치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선거는 투표용지가 아닌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지식력으로 승패가 갈라진다. 다음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될 2012년의 동아시아를 그려 보면 선거 결과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먼저 경제력부터 보자. 일본과 중국 경제 사이에 끼었다는 ‘샌드위치론’은 사치스러운 표현이 될 위험성이 높다. 5조 달러 클럽의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1조 달러 클럽의 한국은 더 이상 샌드위치의 가운데 고기나 야채의 위치를 유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5조 달러 클럽(일본, 중국)과 1조 달러 클럽(한국, 아세안, 호주, 인도)으로 구성된 동아시아경제는 미국, 유럽연합과 세계경제를 삼분하는 크기로 뚱뚱해질 것이다.
군사력을 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중국 정부의 금년 공식 발표 군사비가 일본에 이어 500억 달러 클럽에 들어섰음을 보여 준다. 한국은 절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중국이 현재와 같은 수준의 군사비 증액을 계속한다면 2012년에는 700억~800억 달러 수준에 달하게 될 것이다. 현재처럼 중국의 비공식 군사비를 공식 군사비의 두 배로 추정한다면 중국은 1000억 달러 클럽으로 격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 세계 군사비가 1조 달러이고 그중의 반 가까운 규모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고 유럽연합이 2000억 달러를 쓰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2012년에 300억 달러 클럽의 우리가 어떤 군사무대에 서 있을 것인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21세기 국력의 꽃인 지식력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공교육비를 기준으로 보자면 동아시아 3국과 미국이 모두 국내총생산의 5~6%를 쓰고 있어서 경제력과 비슷한 추세 변화를 보여 줄 것이다. 미국은 전 세계 교육비 2조 달러의 30%를 유지할 것이며, 일본과 중국이 비슷한 규모의 위치를 차지하고, 한국은 한참 뒤떨어져서 2012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한국은 세계 4강이 모두 모여 각축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2012년 무대에서 오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여건에서 바람직한 배역을 마련하기 위해 힘든 선거를 치러야 한다. 전망을 더 어둡게 만드는 것은 ‘선거 안의 선거’다. 대통령 후보들의 외교, 안보, 통일에 관한 첫 번째 TV 토론은 실망이었다. 질문도 진부하기는 했으나 21세기 시세와 처지를 읽고 대처하는 안목의 수준은 100년 전의 유길준, 량치차오,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훨씬 못 미치는 안타까움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지도자 복이 있으려나.
하영선 서울대학교 교수
[리셋 코리아] 미·중 디커플링 충격 대비에 사활 걸어야
중앙일보 | 2007-12-10
윤석열 이후 노골화한 `혐오·선동 정치`, 이걸 없애려면
오마이뉴스 | 2007-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