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탈정치, ‘강대국의 꿈’ 되살릴 수 있을까
kor_eaiinmedia | 2017-05-09
나지원
프랑스 대선에서도 대세는 ‘비주류’였다. 공직 선출 경험이 전무한 에마뉘엘 마크롱과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ront National) 당수 마린 르펜이 결선투표에 진출한 것이다. 작년 영국의 브렉시트에 이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서 극우정당이 약진하는 흐름에서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주류 정치인에 대한 혐오와 ‘아웃사이더’에 대한 갈망을 단지 정치의 감정화나 극단주의의 득세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스위스의 정치학자 한스 페터 크리에지(Hanspeter Kriesi)의 분석처럼 이는 대의민주제의 실패라기보다 기존 정당 구도가 반영하지 못하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단층, 특히 세계화에 대한 입장과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신진세력의 부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프랑스 대선은 이와 같은 ‘탈정치의 정치’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 환호에 얼마만큼의 진정성이 필요한지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을 자아낸다. 최상류층이면서도 정치신인 이미지와 거리낌 없는 발언을 통해 ‘신선하다’는 인상을 심는데에 성공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결선투표에 오른 두 사람 역시 경력은 주류에 속하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비주류의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표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크롱의 경우, 금융계 출신으로 현 정부의 경제부 장관을 지낸 엘리트임에도 지난해 돌연 사임하고 신당을 창당하는 파격 행보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존 정치세력과의 극적인 결별과정을 통해 그는 좌우를 막론하고 수십 년간 누적된 부정부패와 거리를 두는 동시에 전통적으로 지지하던 정당에조차 환멸을 느끼던 유권자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기존 정당의 대안으로 등장한 탈정치
하지만 그가 제시한 공약은 이와 같은 참신한 외양과는 거리가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 공공지출 증가, 유럽연합(EU)의 강화 등은 이미 지난 20년간의 흐름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정책의 급진성만을 따져본다면 르펜의 공약이 반기득권에 가깝다. 미국 국제문제 전문지인 포린 폴리시는 공약은 그 어느 때보다 혁신적이었으나 후보와 조직이 너무 진부한 모양새였던 힐러리 클린턴의 실패를 마크롱의 선전과 비교하면서 내실만큼이나 새 간판, 새 얼굴을 제시하는 노력이 유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프랑스가 처한 대외적 난관을 타개할 해법을 좋은 이미지만으로는 얻기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프랑스 국내에서는 대선 과정에서 국내정치와 경제 문제에 외교정책이 완전히 묻혔다는 지적이 있다. 모든 선거가 대개 국내 이슈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국제정치에서 상당한 입지와 역량을 자랑 하는 국가의 대선에서 대외정책에 관한 논쟁이 대폭 축소되었다는 점은 프랑스가 처한 3중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이다.
무엇보다 대외정책에 동원할 만한 재정여력이 고갈되고 있다. 정부 재정적자는 GDP의 3%대에서 낮아질 기미가 없는 반면, 경제 성장률은 1%대에 머무르고 있다. 이를 만회 하기 위해 2016년에는 조세 및 준조세 총액이 GDP의 45%에 육박했지만 적자를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재정적자 GDP 3% 이내 유지라는 유럽연합 협약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투자유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난민 문제, 테러리즘 등 국제정세 급변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수단 확보와 운용을 위한 자금이 부족해지고,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국제 위상 약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재정 문제에 관해 두 후보가 내놓은 공약은 대동소이하다. 임기 말까지 정부 지출을 GDP의 52~53% 수준으로 낮추며, 잔업수당에 대한 세금공제를 부활시킨다는 것이 골자다. 퇴직연령을 현행 62세로 유지(마크롱)할 것인지 60세로 낮출 것(르펜)인지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가 있으나 어느 쪽이든 만성적 재정적자와 성장 둔화 해소를 위해서는 지금 보다 훨씬 급진적인 정책이 불가피하며 공약 이행 과정에서 사회적 진통과 갈등이 수반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반면 통화·무역 정책에서는 차이가 확연 하다. 마크롱은 유럽연합 협력 강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선호한다. EU 차원의 해외투자 감독기구, 독일과의 공동 경제개발계획, 유럽과 아·태 지역 간 무역 강화 등 이미 달성한 통합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에 비해 르펜은 프렉시트, 즉 프랑스판 EU 탈퇴를 강력히 주장한다. 유로화를 버리고 프랑화로 복귀하자는 주장이 먼저 눈에 띈다. 통화정책에서 주권을 회복해야 제대로 경기부양을 추진할 수 있다는 논리다. 같은 맥락에서 자유무역 협정 거부, 외국인 고용 시 추가 세금 부과, 독자적 농업정책 추진 등의 공약은 보호주의적 색채가 뚜렷하다.
프랑스 대외정책의 3중 딜레마
르펜의 프렉시트는 안보에서도 예외가 아 니다. 테러리즘에 대응하기 위해 솅겐 협정 에서 탈퇴하여 국경을 부활시키자는 것이다. 일련의 테러 공격으로 고조된 안보 우려가 대선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테러 우범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는 ‘보초병 작전(Operation Sentinelle)’ 지속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지만 경찰 인력 및 장비의 대대적 보강, 극단주의자 격리 또는 추방, 첩보 기구 강화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그 증거다.
두 후보가 모두 국방비를 GDP의 2%까지 증액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한 것도 안보 위기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재정지출의 대폭 삭감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다음 대통령이 어떻게 국방비 증가방안을 마련할지는 미지수다. 올랑드 정부가 추진한 국방 투자계획이 대부분 다음 정권으로 미뤄진 것을 고려하면 재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의도와 역량의 격차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결선에 오른 두 후보가 공히 의무병역 도입을 주장한 부분에서는 프랑스인들의 절박함을 유추할 수 있다. 그 절박함이란 우선 개인 차원에서 삶에 대한 불안이 급증했다는 의미이지만 시대 변화에 따라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가 불안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차 대전 이래 프랑스는 승전국, 핵무기 보유국,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는 지위를 통해 독일을 견제하는 동시에 유럽 통합을 주도하고, 냉전구도에서 제3의 목소리를 견지하는 식으로 ‘자주외교’와 강대국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나토(NATO) 회원이지만 통합군에 불참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러나 국제역학 변화는 통합 속 주권, 동맹 속 자주라는 전략의 입지를 지속적으로 좁혀 왔다. 독일의 경제적 부상은 유럽연합 내에서 프랑스의 정치적 주도권을 잠식했으며 2009년 나토 완전 복귀도 독자적 국방에 한계를 느낀 데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다. 즉, 과거의 강대국 지위에만 주로 의존하여 준강대국 혹은 중견국(middle power)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고, 프랑스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결국 누가 5월에 엘리제궁에 입성하더라도 프랑스가 국제정치에서 처한 3중의 딜레마를 피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한 르펜의 해답이 ‘주권으로의 회귀’라면 마크롱의 답은 ‘통합과 주권 사이의 새 균형 찾기’라고 할 수 있다. 후자의 해답이 원론적으로는 바람직하지만 답에 이르는 길에는 훨씬 더 많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정당 기반이 취약한 두 후보의 상황은 실패의 가능성을 키우고, 배타적 민족주의의 대두는 그 실패에 상당한 후폭풍이 뒤따를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나지원 동아시아연구원(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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