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보수 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이는 몇 해 전 필자가 영국 보수당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쓰도록 이끈 의문이었다. 현 질서와 가치를 지킨다는 보수당이 200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정치적 경쟁력을 유지하며 생존해 왔을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더욱이 다른 유럽 국가들이 혁명과 전쟁으로 체제가 붕괴했던 것에 비해 영국은 그렇게 오래된 체제가 어떻게 급격한 변화를 피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었다.

‘보수 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이는 몇 해 전 필자가 영국 보수당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쓰도록 이끈 의문이었다. 현 질서와 가치를 지킨다는 보수당이 200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정치적 경쟁력을 유지하며 생존해 왔을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더욱이 다른 유럽 국가들이 혁명과 전쟁으로 체제가 붕괴했던 것에 비해 영국은 그렇게 오래된 체제가 어떻게 급격한 변화를 피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었다.

 

미국에서 갑부 중의 갑부라 할 수 있는 워런 버핏이 최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을 읽으며 그 책을 쓸 때의 궁금함이 되살아났다. 버핏은 자기와 같은 거대 갑부(super-rich)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려 재정 적자 해소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핏뿐만 아니라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와 같은 갑부들도 그와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 그러나 사실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이렇게 자발적으로 세금을 더 내겠다는 말은 어디서나 듣기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왜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할까. 그가 진보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즘 한국에서라면 빨갱이라는 말까지 들을 수 있다. 물론 그런 말을 듣기에 버핏은 가진 게 대단히 많고 너무도 자본주의적이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매우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그는 현 질서하에서 가장 큰 수혜를 보는 사람이다. 미국의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까지 받은 상황에서 부자에 대한 세금 인상이 경제 위기 극복과 궁극적으로 경제적 활력의 회복에 도움을 준다면 그때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버핏일 수 있다. 더욱이 자신의 그런 주장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현 질서에 불만을 갖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급격한 변화 없이도 현재의 틀 속에서 경제적·사회적 문제점이 치유되고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장기적으로 그에게 결코 손해가 아닐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노동 분규나 복지 논쟁을 보면 1920년대의 영국이 흥미로운 비교의 대상이 될 것 같다. 당시 영국은 실업의 증대와 경제 침체로 어려움을 겪었다. 철강·조선·탄광 등 주요 산업은 후발국의 추격에 쫓겼고, 환경·주택·공중보건 등 사회복지 분야도 악화되었다. 또한 이 무렵은 유럽 전역에 사회주의의 도전이 거셌던 시기였고,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자유당을 제치고 보수당과 권력을 다투는 경쟁자가 되었다. 이때 보수당을 이끈 지도자는 스탠리 볼드윈이었다. 그는 제철업을 하는 기업가 집안 출신이었지만 1924년 10월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시대적 변화에 맞춰 ‘새로운 보수주의’를 제창했다. 그가 내건 공약은 사회적 조화, 산업적 동반자 관계, 대결보다 합의 중시, 국민의 신뢰와 자신감 회복 등이었다. 그의 리더십하에서 보수당은 이념적 강경노선을 피해 보다 중도적 입장을 취했고 노동자들에게 보수당이 반(反)노동자 세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했다. 제1 야당으로 부상한 노동당을 적대적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총파업과 같은 심각한 노동쟁의가 발생했지만 볼드윈의 이런 태도로 인해 곧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 당시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는 국내의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이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극단적 정파의 부상과 체제의 전복으로 이어졌지만 영국은 그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보수당의 선제적 대응이 기존 질서를 지켜내도록 한 것이다.

 

요즘 우리의 복지 논쟁을 보면 기득권 세력이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태도는 경제적 침체와 사회적 양극화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이 공동체의 고통을 분담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비춰진다. 복지, 대기업의 사회적 책무 혹은 세금 인상을 언급하면 좌파라는 비판까지 받는다. 그러나 민주 사회에서 현재의 가치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힘이나 이념적 공세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의 예에서 보듯이 현 질서가 그런대로 괜찮다는 믿음이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될 때 보수의 가치는 존속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부자는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워런 버핏이야말로 보수 중의 보수인 셈이다. 지켜야 할 것이 많다면 현재를 지키기 위한 희생과 부담의 몫도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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