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군 병력을 동원한 비상계엄의 후폭풍이 거세다. 계엄은 다행스럽게 날이 밝기 전에 해제됐지만 충격파가 너무도 크다. 대통령 직무정지로 인한 정치적 공백은 외교·안보·경제·사회 각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비상계엄 선포 전과 후의 한국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다. 올해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한·일 관계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진행하던 윤석열 정부의 ‘기획’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현 자민당 부총재)의 방한이 취소됐고,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셔틀외교도 멈춰섰다. 한·일이 일반적 국교 관계를 규정한 한일 기본 조약 체결 60주년(6월 22일)을 기념하기 위한 정부의 준비 작업에도 제동이 걸렸다. 민간 차원에서 추진하던 교류·협력 행사 역시 타격을 받았다. 한·일 관계 개선과 진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노력을 들였건만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 힘들었던 과정을 돌이켜보자.

계엄 이후 한·일 화해 로드맵 안갯속 

2018년 10월 조선인 강제 징용과 관련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일본이 강력히 반발하며 한·일 관계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외교·안보·경제부터 민간 교류에 이르기까지 양국 관계는 파국에 가까운 상황을 맞았다. 상대에 대한 양국 국민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이후 화해를 위한 여러 방안이 제시됐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고, 결국 문재인 정부는 난제를 남기고 퇴진했다. 21세기를 시작하며 김대중 대통령이 열었던 한·일 화해의 시대가 상처와 분노 속에 양국의 역사 화해는 지체되고 말았다.

2022년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해 7월에 민·관 협의회를 출범시켜 한편으로 징용자 문제의 해법 마련을 모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해자 측 및 일본 정부와 소통하면서 마련한 해법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부는 공개 토론회와 현인회의를 거쳐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2023년 3월 ‘제3자 변제’를 공식 방안으로 공표하고,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다시 시동을 걸었다. 효과는 빠르고 컸다. 각 분야의 꽁꽁 얼었던 관계가 빠르게 녹기 시작했고, 싸늘하게 식었던 양국 국민의 마음에도 온기가 퍼져 나갔다. 지난해 9월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우리 국민 1006명을 상대로 실시한 ‘인식조사’에서 일본에 대한 인상이 ‘좋다’거나 ‘대체로 좋다’는 응답자가 41.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을 정도다. 2023년 28.9%보다 12.8%포인트나 높아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화해의 시대가 열릴 것이란 기대가 솟아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한·일 화해 로드맵이 안갯속에 가려졌다.

이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윤석열 정부가 해법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드러난 부정적인 측면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과 일본의 태도에 반발하거나 우려를 표명하며 인내했다. 한국 정부는 남은 물컵의 반 잔을 일본이 채우길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은 한 치의 호응과 양보가 없었다. 이런 일본의 고압적 태도에도 윤석열 정부는 양보를 거듭하며 화해 정책을 밀고 나갔다. 대일 저자세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필자는 문재인 정부에서의 ‘지체된 화해’와 비교해 이것을 윤석열 정부의 ‘강요된 화해’라고 부른다.

강요된 화해 정책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낳았고, 남남 갈등을 야기하는 등 진통도 컸다. 지난해만 해도 1월 군마현 조선인노동자추도비 철거 사건에 이어 7월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반발과 우려가 분출했다. 또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과정에서 뉴라이트 논란이 일더니 급기야 광복절 경축식은 진보 진영이 보이콧하며 반쪽짜리 행사가 되고 말았다. 진영 간의 정쟁이 가열됐고,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를 ‘저자세’라거나 ‘굴욕적 외교 참사’, ‘제2의 경술국치’, ‘정신적 내선일체’, ‘친일 매국 밀정 정권’ 등 극단적 표현까지 등장했다. 국내 분열을 담보로 하는 이런 식의 화해 시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반대 진영을 포용하는 진정 어린 자세 전환과 국민 화합을 향한 노력 없이 강요된 화해의 길로만 간다면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라고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중앙일보 2024년 8월 23일자 23면)

강요된 화해는 더 이상 지속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체된 화해의 시기로 회귀해서도 안 된다. 건강한 한일 관계를 위해선 지체된 화해와 강요된 화해를 넘어 전진해야 한다. 재원 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제3자 변제의 행방이 한·일관계 전진의 여부를 가늠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일본의 호응을 끌어낸 ‘제3자 변제’를 완결시킬 방안으로 ‘한·일 화해재단’의 설립을 제안한 바 있다.(중앙일보 2024년 11월 15일자 23면)

어쩌면 일본은 달콤했던 윤 정부와의 로맨스를 기억하며 새 정부와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 이니셔티브로 추진된 한·일 관계 개선의 동력이 계엄과 탄핵으로 소진된 상황에서 이제는 일본이 나서야 한다. 정권교체 여부와 관계없이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어 한·일 화해의 진전을 향한 진정성을 보여줄 때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7일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해결의 필요성을 표명하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했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성사시킨 한·미·일 3국 협조체제를 유지할 것임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한국이 리더십 공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에 이시바 총리가 우리 입장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만약 후반기에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면 역대 어느 총리보다 한국에 우호적인 이시바 총리가 양국의 역사 화해를 향해 이니셔티브를 발휘해 국교정상화 60주년의 대미를 장식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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