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김일성의 주체나 김정일의 선군(先軍)처럼, 김정은도 자기 시대의 슬로건을 만들어 낼 것이다. 북한에서의 슬로건은 우리와 다르다. 마치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니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말이 그저 듣기 좋은 레토릭이었던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슬로건이 바로 국정지표가 된다. 그 시대 상황에 대한 해석, 그래서 그 정권이 지향하는 목표를 드러내는 것이다.

김일성의 주체나 김정일의 선군(先軍)처럼, 김정은도 자기 시대의 슬로건을 만들어 낼 것이다. 북한에서의 슬로건은 우리와 다르다. 마치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니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말이 그저 듣기 좋은 레토릭이었던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슬로건이 바로 국정지표가 된다. 그 시대 상황에 대한 해석, 그래서 그 정권이 지향하는 목표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김정일의 선군은 슬픈 슬로건이었다. 최대 우방이었던 소련이 갑자기 무너졌고, 혈맹이었던 중국은 남한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김일성은 돌연 사망했다. 남한의 김영삼 정부는 북한을 ‘고장 난 비행기’라며 붕괴에 따른 흡수계획을 챙기고 있었다. 게다가 연이은 홍수와 가뭄은 온 나라 전 인민을 고난의 행군으로 내몰고 있었다. 자신의 시대가 왔지만, 정작 김정일은 나타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자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더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버지의 시신 뒤에 숨는 것밖에 없었다. 겉으론 효자의 3년상이었으나, 실제론 어쩔 수 없는 비겁함이었다.

 

몇 년 후 김정일은 자신의 시대를 상징할 슬로건으로 기껏 선군을 들고 나왔다. 일단 살고 보자는 의도였다. 개방·개혁이 새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의 방향이었고 그것만이 조국과 인민을 살리는 길이었지만, 그에게는 죽음의 길이나 다름없었다. 치사하지만 일단은 자신과 정권을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김일성의 주체보다 훨씬 더 수세적인 전략이었고, 그만큼 북한 주민에게는 하염없이 슬픈 전략이었다.

 

그러나 지금 김정은의 북한이 처한 상황은 사뭇 다르다. 러시아는 살아났고, 중국은 G2로 부상했다. 등거리 외교라는 명목하에 남한을 편들던 시절은 지나갔다. 천안함 사건에도 오히려 두둔하고 지원하는 관계로까지 복원되었다. 심지어 사상 유례없는 3대 세습조차 적극 후원한다. 시장에 맡긴 탓이긴 하지만, 경제도 최악의 시절에서 벗어났다. 최소한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 남한 정부도 급작스러운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모로 보나 사정은 김정일 정권이 출범하던 시기와 비할 데 없이 좋아졌다. 그만큼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슬로건을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물론 당장 새로운 슬로건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은 아버지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인수위원회가 이런저런 슬로건을 검토하고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김정은 시대의 슬로건으로 공진(共進· coevolution)을 추천한다. 여러 종(種)이 서로 영향을 주며 함께 진화해 나간다는 생물학 이론에서 비롯된 공진이야말로 현재의 북한에 가장 적합한 전략이다. 피로 맺은 중국과 공진이기도 하고, 피를 나눈 남한과 공진이기도 하며, 21세기 세계와 공진이기도 하다. 상대와의 친소(親疎)·경중(輕重)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상적·정치적 부담도 크지 않다. 선군과 선경(先經)의 공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공진의 핵심은 과감한 경제개혁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와 남한은커녕 중국과의 공진조차 불가능하다. 공진이 아니라 공존조차 쉽지 않다. 세계와 남한은 물론 중국도 그 길을 걸어왔고 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택하라는 중국의 요구는 점차 강해질 것이다.

 

사실 경제개혁은 중국 지도부의 일관된 인식이다. 이미 20여 년 전 덩샤오핑은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으면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인민생활을 개선하지 않으면 죽음의 길밖에는 없다”고 선언했다. 4년 전 중국 중앙방송 프로그램에서 시진핑은 “독사에 물린 팔뚝을 잘라내듯 과단성 있게 경제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드디어 올해 후진타오는 북한의 개방·개혁을 공개리에 주문하기도 했다. 결국 북한으로서는 밀려 선택하느냐, 혹은 앞서 선택하느냐 정도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공진을 북한에만 요구할 일은 아니다. 주변에서도 북한이 변화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함께 변화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공진의 정의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침 한국의 국정원장이 ‘보다 큰 틀의 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의도했든 안 했든 공진적(共進的) 판단이라는 점에서 올바른 설정이다. 실은 진작 그랬어야 했다. ‘비핵·개방·3000’이든 ‘그랜드 바긴’이든 단순한 선물 꾸러미가 아니라 공진의 시각이 담겨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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