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올해로 미수(米壽)를 맞은 키신저 박사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서울을 다녀갔다. 국제정세에 대한 강연, 젊은 학생들과의 토론, 대통령과의 대화 등 바빴지만 즐거운 일정을 소화했다. 그의 정세분석이나 정책진단은 미수의 나이임에도 들을수록 설득력이 넘치는 탁월함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는 국가의 운명에 대한 깊은 생각의 일단을 들려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올해로 미수(米壽)를 맞은 키신저 박사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서울을 다녀갔다. 국제정세에 대한 강연, 젊은 학생들과의 토론, 대통령과의 대화 등 바빴지만 즐거운 일정을 소화했다. 그의 정세분석이나 정책진단은 미수의 나이임에도 들을수록 설득력이 넘치는 탁월함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는 국가의 운명에 대한 깊은 생각의 일단을 들려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나라에서는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오늘날 유럽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국민에 대해 희생을 요구하는 지도자가 나올 수 없게 된 것은 곧 이 시대의 근원적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는 키신저의 지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20세기 핵무기 시대까지를 관통하는 역동적 세력균형론을 전개한 석학이며, 1970년대 초 저우언라이(周恩來)와의 대화로 일거에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바꾸어 냉전의 판도를 뒤집은 큰 외교가인 그가 이제 현인(賢人)의 경지에 이르러 내린 결론인 듯싶어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형편을 생각해 보자. 자존심과 자신감은 비전을 갖게 하는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일 수는 없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의 승전보와 휘날리는 태극기가 전 국민에게 큰 기쁨과 자신감을 선사해 준 것은 사실이다. 100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을 짓눌러 온 두려움, 패배의식, 피해의식을 떨쳐버린 젊은 세대가 드디어 그들의 창의력과 경쟁력을 마음껏 세계의 중심무대에서 떨쳐 보임으로써 이 나라가 차지한 오늘의 역사적 위치를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황홀했던 국민적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민족적 과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올해는 1910년, 일제에 강제합병되며 국권을 상실했던 경술국치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일제 35년, 그리고 남북분단 65년, 결과적으로 지난 100년 동안을 통일된 독립국가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국민적 축제의 분위기 이면에는 이렇듯 냉혹한 역사의 현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겐 민족통일, 국가통일, 국토통일이란 엄청난 역사적 과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숙제인 통일 문제, 하지만 미래의 비전을 추구할 여유보다는 당장의 실리를 챙기기에 바쁜 지금의 풍조에 휩쓸려 국민적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분위기다. 특히나 정치권의 제일 큰 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세종시를 둘러싼 논란에서조차 통일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원안이든 개정안이든 세종시 문제가 앞으로의 통일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여야를 막론하고 우리의 중대 사안인 통일에 대해 어떤 전망이나 대책도 들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그동안 통일주체세력을 자처하며 앞장서던 세력이나 단체들마저 이 경우에는 의견표명이 전혀 없다는 것도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민족의 자존과 운명이 걸려 있는 통일 문제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공론의 장(場)에서, 그리고 정치무대로부터 점차 그 비중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은 통일 추진이 수반하는 대가(代價)와 희생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할 국민적 용기와 리더십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게 된다. 한민족과 한반도의 통일 문제는 세계의 중심무대로 진입한 대한민국 국민의 굳은 결의와 아무리 큰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확고할 때만이 해결 가능한 것이다. 통일비용이 얼마나 막대할지는 정확히 예측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그동안 치러온, 아니 지금도 치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무한정 치를 수밖에 없는 분단비용에 비하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국민들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국민들에게 통일을 위한 희생을 각오하도록 촉구하는 리더십의 출현을 역사는 기다리고 있다.

 

국민에게 희생을 촉구하는 리더십을 민주정치에서 기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과정에서 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다만 평상시가 아닌 비상시를 만났다는 국민적 인식이 고조될 때는 정치와 리더십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간간이 보아 왔다. 세계사의 흐름으로 볼 때 바로 지금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좌우할 선택의 시점이 아닐까. 우리 국민의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이홍구 칼럼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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