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북한이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 협상을 제의했다. 9·19 공동성명과 지난달 보즈워스 특사 방북 회담, 북한 신년공동사설에서 예고됐던 수순이다. 6자회담이 재개되고, 북핵의 완전한 신고와 검증, 그리고 폐기단계의 협상이 시작되면, 북한은 또다시 전략적 결단의 순간에 직면한다.

북한이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 협상을 제의했다. 9·19 공동성명과 지난달 보즈워스 특사 방북 회담, 북한 신년공동사설에서 예고됐던 수순이다. 6자회담이 재개되고, 북핵의 완전한 신고와 검증, 그리고 폐기단계의 협상이 시작되면, 북한은 또다시 전략적 결단의 순간에 직면한다. 북한은 그 전에 체제와 정권 안전판이 확보되지 않으면 핵폐기 결단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북미 간 평화협정을 통해 어떠한 형태로든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됐다는 물리적 담보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달라진 점도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지켜야 하는 체제는 경제적으로 허약해져가는 체제이며, 강성대국을 성공적으로 건설하지 못하면 정당성이 상실될 체제이며,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되어가는 체제라는 점이다. 지켜야 할 정권은 정권 기반이 확실치 않아 후계자가 어렵게 지탱해야 하는 정권이며, 예상할 수 없는 안과 밖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정권이라는 점이다. 2년 남은 강성대국 준비기간을 화폐개혁 등 정책 수순에 따라 담담히 버텨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핵문제와 경제난, 대외적 고립을 후계자에게 물려주어야 할지 고민이 깊은 것이 김정일 위원장의 처지이다. 북한의 '정중한' 제의가 유화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재성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미국은 북한의 제의에 대해 제재 해제 불가, 6자회담 선복귀로 입장을 정리했다. 북한에 대해 세 번의 양보는 있을 수 없고, 제재와 협상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관리론에서 비핵화의 진전 정도야말로 대북 정책의 핵심적 지표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수십차례에 걸쳐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언명했음에도, 대북 적대시 정책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결국 북한의 주장은 핵을 갖기 위한 핑계이고, 북한 리더십의 변화가 있어야 핵문제가 풀린다고 보는 미국 일부 논자들이 출현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점은 올 한 해 미국 민주당 정부의 처지가 북핵 문제에 적극적인 노력을 쏟을 여유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북핵 문제에 대해 주변국의 긴장감과 정책동력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체감된다. 주변국들은 북한이 핵국가가 되기로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고 판단하고, 이를 전제로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재의 소강상태를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 문제는 포괄적으로 길게 보아야 하지만 2012년 이후의 구도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장래 북한의 국제정치적 지위에 대해 모두가 말하기를 꺼릴 때, 그 복잡한 문제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는 데 정치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을 모두가 거부할 때, 북핵 문제는 단기적 협상 항목 간의 선후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우리의 '그랜드 바겐'안과 미국의 '포괄적 협상'안이 논의된 이후, 첫 번째 안건인 북한의 평화협정 제안이 어떠한 전체구도와 수순과 연결되는지 아직도 불명확하다. 한국 정부는 비핵화 과정의 진전을 전제로 평화협정 협상 입장을 밝혔고 이는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더 '그랜드'하고 더 '포괄적'이며, 더 세부적인 안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조직적 대응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평화협정 협상을 통해 북한이 원하는 정치적·안보적 보장과, 미국과 한국 등 주변국의 한반도·동북아 전략의 일치점을 끈질기게 찾아내고, 이를 동북아 평화구도와 연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어떤 주변국이 그런 수고를 감당할지 알 수 없다. 결국 전략적 대안은 한국만이 낼 수 있다. 성과 없이 한두 해 흐르고 나면 전혀 다른 동북아 정세가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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