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평양의 아리랑, 윤밴의 아리랑](../images/bg_tmp.jpg)
[중앙시평] 평양의 아리랑, 윤밴의 아리랑
kor_eaiinmedia | 2009-08-11
조동호
분단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과 북을 관통하는 민족의 노래는 단연 아리랑이다. 공식적으로도 그렇다. 1991년 일본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하면서 한반도기와 아리랑이 남북한을 상징하는 국기와 국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대회에서 남한의 현정화와 북한의 이분희로 구성된 코리아 여자팀이 우승했을 때 시상식장에서는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사실 아리랑을 공동의 국가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훨씬 이전의 일이다. 64년 도쿄 올림픽에 파견할 단일팀을 논의하기 위해 열렸던 63년 1월 스위스 로잔 회담에서 남북한은 아리랑을 국가로 합의했던 것이다. 다만 단일팀 파견이 무산되면서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국제무대에서뿐만이 아니었다. 남북한의 친선 경기며 남이 북을 혹은 북이 남을 응원하는 국제 경기에서는 어김없이 한반도기가 펄럭이면서 아리랑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러나 2002년 한반도 남과 북의 하늘에는 서로 다른 아리랑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이 남과 북에서 동시에, 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로 새롭게 태어났던 것이다.
남쪽의 아리랑은 월드컵의 흥분과 감격 속에서 재창조되었다. 기존의 느리고 슬픈 가락은 윤밴(윤도현 밴드)에 의해 록 버전으로 바뀌었고, 그 강렬한 비트로 아리랑은 민족의 희망과 성취를 낙관하는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아리랑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목 터져라 불렀고, 부르면서 우리 내면에서 폭발하는 힘을 느꼈다. ‘오 필승 코리아’가 월드컵 선전을 위한 응원가였다면, 아리랑은 우리의 저력을 확인하고 도약을 확신하는 찬가였다. 미래를 위한 아리랑, 희망의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그때 평양에서도 아리랑은 새롭게 태어났다. 2002년 4월 29일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평양 능라도의 5·1 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정식 명칭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이었다. 카드섹션과 매스게임이 약 90분간 어우러지는 이 공연에는 유치원생까지 포함된 어린 학생 10만 명이 동원되었고, 8월까지 무려 넉 달이나 지속되었다.
학생들은 수개월의 혹독한 연습을 견뎌야 했고, 공연 기간 중에는 오전 수업만 하고는 오후 내내 경기장에서 리허설을 해야 했다. 조명효과를 위해 공연이 해질 무렵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장기간 계속되는 고된 연습과 공연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당연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내리쬐는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다 보니 영양실조에 걸리는 학생들도 많았다. 필자도 북측 안내원에게 학생들 먹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빵이랑 우유는 줍네다.” 그렇게 힘든 공연을 하면서 빵과 우유만 준다는 답도 기막혔지만, 빵이랑 우유 다음에 붙여진 조사 ‘는’이 전달하는 뉘앙스가 가슴을 더욱 막막하게 했다.
세계 최대의 매스게임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평양의 아리랑은 그만큼 분노의 아리랑이었고, 북한은 못 보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 선전했지만 보고 나면 평생 가슴 아플 아리랑이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UNCRC)가 아동의 인권 침해를 이유로 북한에 시정을 권고했을 정도다.
한창 경제난이 지속되던 2002년에 이런 장기간의 대규모 공연을 준비한 이유는 김일성의 90회 생일을 축하하고 그를 통해 체제를 결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준비 당시에는 김일성을 상징하는 ‘첫 태양의 노래’로 명명되었다가 김정일의 지시로 “조선이 어떻게 파란 많은 수난의 력사를 거쳐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었으며 오늘은 어떻게 존엄 있는 민족으로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보이기 위해 아리랑으로 변경되었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수난을 상징했던 아리랑이라는 코드를 통해 체제의 문제를 민족의 문제로 전환하려는 의도였고, 화려한 공연을 통해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기쁨으로 환치시키려는 정치적 환각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체제가 유지되고 주민이 결속될 리 없다. 문제는 식량이지 춤과 노래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주민을 먹일 능력이 없는 북한 당국으로서는 더 잦은 공연으로 주민의 불만을 눈가림할 방법밖엔 없었다. 그래서 아리랑은 2005년 재개되었고, 1년을 쉰 후 2007년과 2008년 연속적으로 공연되었다.
그러고는 지난 월요일 다시 2009년의 아리랑이 두 달 일정으로 시작되었다. 답답할 뿐이고, 뻔히 보이는 희망의 길 즉 개방과 개혁의 길을 놔두고 언제까지나 이런 퇴행적인 방법을 지속해 나갈지 안타까울 뿐이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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