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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과 번영의 동아시아 다자질서 건축 전략: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을 넘어서

  • 2014-12-24
  • 손열

ISBN  979-11-86226-01-8

EAI 동아시아 평화협력구상 연구 보고서

 

 

저자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겸 원장.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도쿄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방문교수를 거쳤고, 현재 동아시아연구원 일본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일본 및 국제정치경제, 동아시아 지역주의, 글로벌 거버넌스 등이다. 최근 연구업적으로는 “지역공간의 개념사 : 한국의 ‘동북아시아’”, “한미FTA와 통상의 복합전략”, “동아시아에서 지역다자경제제도의 건축 경쟁”, “Japanese Market Opening Between American Pressure and Korean Challenge” 등이 있다.

 

 


 

 

서론

 

21세기 들면서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거대한 변환을 겪어 왔다. 동아시아공동체를 내걸며 다자주의 제도 설계에 나섰던 협력적 분위기는 크게 약화되고 주요국 간 경쟁적 분위기가 대체하고 있다. 미중 간 권력이동에 따라 미국 중심의 안보질서가 도전을 받고, 지구화의 진전에 따라 경제의 다자주의적 제도화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한편, 근대이행 과정에서 야기된 정체성 갈등이 부각되면서 전통적 외교관계가 동요하고 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는 지역질서의 재건축 시대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아시아재균형(Asia rebalance)을 기치로 전통적 동맹네트워크의 강화, 파트너십의 확대, 지역 다자제도 추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을 중심으로 한 무역과 투자의 확대, 군사력 전진배치, 민주주의와 인권 등 보편적 가치외교 추진 등 복수 층위에서 아시아 개입을 강화해왔다. 동맹을 토대로 한 안보질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를 중심으로 한 경제질서란 기성질서에 새로운 층위를 보강하여 지도력을 유지하려는 구상이다. 그러나 경제의 상대적 쇠퇴에 따라 축소전략을 선택해야 하는 조건 하에서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중국을 유효하게 견제 관여하기 위해서 동맹국의 적극적 역할을 요청해 왔고, 아베 정권 하의 일본은 이에 기동적으로 대응하면서 미일동맹을 축으로 중국 견제를 본격화하고 있다.

 

지역질서의 재건축을 꾀하는 다른 한 축은 중국이다. 중국은 국력신장에 걸맞게 핵심이익을 정의 확대하는 과정에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제한하는 반(反)접근, 지역거부 전략을 추구하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주장적 입장을 견지하며, 위안화 평가절상 압력 등 경제문제에서 미국에 사안별로 대응해 왔다. 나아가 중국은 이제 가치판단과 행동기준을 정하는 규범과 이를 구현하는 제도를 독자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안보질서가 냉전의 유물인 동맹체제에 의해 지탱되어 왔음을 비판하면서 공동, 포괄, 협력, 지속가능한 안보를 주요개념으로 하는 ‘신안보관’이란 규범을 제시하고 미국이 배제된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 회의’(Conference on Interaction and Confidence Building Measures in Asia: CICA)를 지역안보 다자기구로 제안하고 있다. 경제 면에서도 중국은 경쟁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미국식 세계화를 비판하면서 지속가능성과 평등성, 다양성을 중시하는 포괄적 발전규범을 제시해 왔다. 2014년 설립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은 금융 및 개발 부문에서, 지난 APEC에서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ree-Trade Area of the Asia-Pacific: FTAAP)는 기존 제도인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이나 미국이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중 양강의 각축을 목도하면서 전문가들은 중국 중심 아시아 세기(Asian century)의 도래, 미중 신냉전 혹은 불안정한 다극화 체제가 등장할 것이라는 상반된 예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보면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중국은 상승하는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외교에 의존하며 협력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으며, 역내 비강대국(중견국)들은 균형이나 편승을 취하기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헷징(hedging)과 다자제도 참여로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의 예측과 다른 형태의 지역질서 건축 혹은 재건축이 가능함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질서 건축은 일정하게 규범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구성원 간 가치, 권리, 의무의 규정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 가는 복합적 과정으로 전개된다(Goh 2013). 새로운 지역질서의 성격에 대한 담론적 경합과 전략적 협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여기서 국가의 협상력은 무력이나 금력 등 전통적 파워 못지않게 지식과 문화 등 소프트파워, 다양한 행위자와의 연결능력(네트워크 파워)이 좌우한다. 문제해결에 적절한 파트너를 선정하고 이들과 지식을 생성, 공유하며 다양한 행위자 네트워크와 연대를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통상 강대국들이 앞서가지만 한국과 같은 중견국도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더욱이 21세기는 다양한 국가 및 초국가 행위자들이 복수의 이슈영역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자율적으로 문제를 관리하고 조정하는 네트워크 거버넌스를 겪고 있다. 21세기 세계질서는 힘의 각축과 세력균형이란 근대질서와 네트워크를 통한 통치라는 탈근대이행이 중첩되어 복합화되고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새로운 권력의 보유가 국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하영선 2006; 2012; 하영선•김상배 2012). 이런 점에서 한국과 같은 중견국은 미중 양 진영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 외교를 벌이거나 외교적 자율성을 잃는 줄서기 외교의 상황으로 몰릴 우려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지역질서 재건축 경쟁 속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발휘할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질서의 변환 과정에서 한국은 강대국 간 경쟁이 패권적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강대국 간 질서건축 경쟁이 대립적 폭력적으로 전개되어 양자택일적 상황이 초래되지 않도록, 서로 공존하면서 조화롭게 진화하는 지역질서를 디자인하는 데 아이디어와 지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미중 간 경합하는 제도들을 품는 동시에 중견국의 적극적 활동공간을 보장하는 다자제도 틀을 설계해갈 필요가 있다. 다자주의 역시 강대국 정치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지만 다자틀 속에서는 강대국과의 권력관계에 따른 비대칭적 이득분배를 완화할 수 있고 다자틀이 제공하는 토론의 장 속에서 규범, 규칙, 의사진행 과정을 활용하여 비강대국의 이해관계를 표출할 수 있으며 이익을 공유하는 국가 및 비국가 행위자 네트워크를 만들어 공통의 이익을 관철할 수 있다. 향후 한국의 지역외교는 지역다자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도록 정책 우선순위를 상향 조정하고 양자외교 및 소다자외교와 연계하는 복합외교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본 보고서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을 명확히 진단한 후, 공생과 번영의 동아시아 네트워크 건축이란 처방을 내리고자 한다.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특징

 

현재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근대 지역질서의 전형인 서구처럼 힘의 각축과 세력균형 논리가 작동하는 안보영역과 시장규율에 의한 초국가적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경제영역으로 구성되어 존재해 왔던 반면, 여러 면에서 서구와 차이점도 보이고 있다. 첫째, 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예(禮)를 명분으로 하여 천하를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나누는 화이(華夷) 개념에 근거한 전통 위계질서로부터 근대 국제질서로의 변환을 급속하고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충분한 조정과 여과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전통질서가 역내 구성원들의 의식과 감정의 차원에 존속하고 있음은 물론, 전통질서의 요소들이 미래질서의 대안적 원형으로 복원되는 경향도 보인다. 동시에 19세기 말 이래의 제국주의가 여전히 기억의 정치 영역에서 잔존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의 양자관계에 족쇄가 되고 있음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최근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주변국들에게 20세기 제국주의 식민지 역사를 상기시켜 안보위협이 되는 경향을 목도하고 있다. 21세기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안보영역에서 근대 세력균형의 논리와 경제영역에서 탈근대 거버넌스적 논리가 작동하는 동시에 정체성의 영역에서 집합적 기억(collective memory)의 유산이 안보 및 경제논리와 함께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둘째, 동아시아 질서에서 안보, 경제, 정체성이란 세 영역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이른바 안보-경제-정체성 넥서스(nexus)를 이루고 있어 각 영역 간 긍정적 혹은 부정적 전이효과(spillover effect)가 초래된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문제는 지역질서의 각 영역 간 선순환 관계가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전후 서구에서 보듯이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되면서 경제적 번영과 함께 안보경쟁이 완화되고 나아가 경제적 상호의존이 더욱 강화되면서 지역의 집합정체성 구성을 추동하는 이른바 경제-안보-정체성의 선순환 구조는 동아시아에서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냉전 해체의 길 속에서 국가 간 안보경쟁이 약화되었지만 국가 중심 민족주의는 또 다른 형태로 경쟁을 야기했고, 동아시아 역내 경제 상호의존이 급속히 심화되었지만 안보경쟁성은 크게 줄어들지 못했으며, 시민사회 간 교류가 활성화되어도 민족주의 감정의 건재에 의해 국경을 초월하는 지역정체성이 쉽게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역사문제가 촉발하는 민족주의 대립으로 과잉안보화가 초래되고 경제협력을 저해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지역의 다자주의적 협력과 통합의 원천을 경제적 상호의존의 증대에서 찾는 소박한 자유주의 이론은 동아시아에서 적용되기 어렵다.

 

요컨대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보-경제-정체성 넥서스는 선순환과 악순환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 공생과 번영의 동아시아를 위한 최대 과제는 안보-경제-정체성 간 협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협력이 가능한 분야에서 시작하여 어렵고 민감한 이슈로 넘어가는 이른바 ‘선이후난’(先易後難)식 기능주의적 접근과 달리 다음과 같은 세가지 과제의 동시적 접근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계속)

 

 


 

 

이 보고서는 손열 · 전재성 · 이용욱 · 박종희 · 이정환 공저의 단행본 《공생과 번영의 동아시아 다자질서 건축 전략》 (동아시아연구원 2015년 출간 예정) 제1장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