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대선을 10개월 앞둔 2002년 2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47.5%였다. 마의 50% 벽을 넘어설 기세였다. 그러나 한 달 후인 3월 5일, 민주당은 이회창 후보 가족의 호화빌라 의혹을 제기했다. 이 후보 장남 부부의 원정출산 의혹도 불거졌다. 3월 말 이 후보의 지지율은 33.7%로 곤두박질쳤다. 떨어진 지지율은 노무현 후보에게로 옮겨갔다. 노무현 후보는 44.8%로 뛰어올랐다. ‘반사이익’이다.
지난 4월 9일 성완종 리스트가 정치권을 강타했다. 이완구 총리를 비롯한 여권 실세들의 이름이 거론됐다. 리스트는 불법대선자금 의혹으로까지 번졌다. 성완종 리스트는 당연히 4·29 재·보궐선거에서 여권에 악재, 야권에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예측됐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새누리당 전패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지율 역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반사이익은 없었다. 선거 결과는 야당의 전패였다. 특히 박빙의 선거로 관심을 모았던 서울 관악을에서도 지지율 역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관악을 유권자 김태석씨(가명·72)는 성완종 리스트가 후보를 선택하는 변수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성완종 리스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돈 준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닌가. 관악을은 원래 야당 성향이 강한 곳인데 나는 여당을 찍었다.” 박정현씨(가명·28)는 “정책이나 이런 거 보고 평소 생각하는 사람 찍었지, 성완종 리스트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권자들 선택기준 다차원화 경향
성완종 리스트가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야권에 반사이익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은 유권자들의 선택 기준이 다원화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은 “과거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선거에서 반사이익 경향이 높았다. 여권의 부패나 무능이 드러나면 야권으로 지지율이 옮겨갔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유권자들의 태도가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쪽의 가치를 복합적으로 보는 상충적인 경향이 높아졌다. 반사이익 현상이 줄었다”고 말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선거 경험이 30년 정도 쌓이면서 유권자가 후보를 선택하는 기준이 다차원화됐다고 분석했다. “과거에는 유권자들이 현안 이슈에 따라서 움직였다면, 이제는 지역 현안에 대한 입장, 해당 후보가 지역에 기여한 바 등 여러 가지를 따져본다. 선거 경험이 반복되면서 유권자들의 투표 결정 변인이 다차원화됐다.”
반사이익도 상대 후보나 상대 정당이 강할 때 작동한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호화빌라·원정출산 의혹으로 빠져나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노무현 후보에게 옮겨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가 강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17대 대선과 비교해볼 수 있다.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BBK 의혹이 불거졌어도 상대 후보인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에게 지지율이 옮겨가지 않았던 데에는 후보와 당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관악을 재·보궐선거에서 성완종 리스트가 지지율 역전으로 이어지지 않은 데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한계가 있다. 유권자들로부터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관악을 유권자 신정호씨(가명·78)는 “이 지역에서만 20년을 살았고 야당만 찍었다. 그런데 야당이 계속 싸움질만 해대니 이번에 처음으로 여당을 찍었다”고 말했다. 윤민호씨(가명·59세)는 “정치권에서 그런 일이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도 그런 일이 많다 보니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런 일에 무뎌졌다고 할까. 사실 뭐 여나 야나 똑같지 않나. 성완종 리스트는 신경 쓰지 않고 생각했던 사람을 찍었다”고 말했다.
예상과는 달리 반사이익의 효과가 없었던 이번 선거에서 강조됐던 것은 여론조사의 영향력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 후보와 정동영 무소속 후보가 경합한 관악을에서는 여론조사 공정성 시비가 붙었다. 서울시 공정선거심의위원회는 정태호 후보 측이 인용한 리서치뷰 조사가 조사표본의 대표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태호 후보 측은 리서치뷰 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자 이를 홍보 현수막에 인용했다. 공심위는 선거법 위반혐의가 인정된다며 현수막 철거 명령을 내렸다. 안병천 관악FM 대표는 이번 관악을 선거가 “한마디로 여론조사만 있는 선거”였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정책이 있고 이슈가 있고 이것을 바탕으로 여론조사가 있는 게 아니라 여론조사가 선거를 아예 끌고가는 느낌이었다. 국회의원 선거는 지역 의제와 국가적 과제가 함께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외주민주주의’
더 큰 문제는 부실한 여론조사의 난무다. 정한울 사무국장은 “이번에 공심위에서 문제가 된 것은 리서치뷰 하나였지만, 각종 여론조사를 들여다보면 데이터가 어그러진 것에서 리서치뷰보다 나은 회사가 보이지가 않았다. 리서치뷰의 경우 정동영 후보의 30대 지지율이 0.9%밖에 안 나왔고, 휴먼리서치의 경우 변희재 후보가 9.9%나 나왔다. 정확도에서 보면 사실 다 똑같은 수준이다. 여론조사 기관들이 자의적으로 사후보정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다. 잘못하면 여론조사가 민의를 반영해 선거전략과 정책을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정치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경험적으로 봤을 때, 700명 이상의 샘플을 조사해야 지역구 선거 여론조사에서 최소한의 신뢰도를 확보한 결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됐던 관악을 여론조사에서 리서치뷰는 431개의 샘플, 휴먼리서치는 510개의 샘플만을 조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런 여론조사들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악을 유권자 성지혜씨(가명·35)는 “정부와 새누리당이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데 지지율이 유지되고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야권 후보가 둘로 쪼개져 나와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될 만한 후보를 밀어줘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여론조사를 보고 지지율이 높은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했다.
정한울 사무국장은 정치권이 갈수록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외주민주주의’라고 비판했다. “선거에서 여론조사가 부각되는 것은 정책, 조직력, 정치적 비전 차원에서 정치권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방증이며 부실한 정치의 결과다. 자기 정치의 내용이 없다 보니 외부 조사기관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외주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정치의 허약함에 있다는 것이다. 선거 마지막 날까지 여론조사 논란만 가열됐던 관악을 선거는 정치의 시급한 복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