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간 양보 없는 신경전에 상호 국민감정도 악화
바이든 중재·방공구역 물밑외교 관계개선 실마리 될지 주목
"수교 이후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12월16일 치러진 중의원 선거를 통해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집권한 이후 1년간 악화일로를 걸은 한일관계에 대해 도쿄의 외교가 인사들과 전문가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작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요구' 발언,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는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당시 총리 발언 등으로 아베 정권 출범 전부터 양국 관계는 삐걱대고 있었지만 지난 1년간 한층 더 악화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日 역사도발 ·韓 법원 판결 둘러싸고 양국 현저한 인식차 = 지난 1년간 한일관계를 흔든 `변수'들은 양국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터져나왔다.
먼저 아베 정권의 `수정주의 역사관'이 한국민 정서에 불을 질렀다. '침략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침략과 식민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村山)담화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겠다'는 등 아베 총리가 4월 국회에서 한 발언은 한국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다. 같은 달 정권 2인자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도 악재였다.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인 절도범이 일본 사찰에서 훔친 뒤 한국으로 반입한 고려 불상에 대해 반환 유보를 결정한 지난 2월 한국 법원의 판결에 반발했고, 9월 도쿄의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기 직전에 발표된 한국 정부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금지 확대에 대해 '하필 이때냐'며 분노했다.
양국 정부도 양보하지 않았다. 아베 정권은 이전 일본 민주당 정부 시절 구체적인 해결방안이 오갔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이미 끝난 문제'라는 뜻을 되뇌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회담보다 일본 지도부의 역사인식 변화가 우선'이라는 입장 아래 제3국과의 외교 현장에서 연방 일본을 강하게 비난했다. 양국 언론이 상대국에 대한 비판기사를 쏟아낸 것도 양 국민의 정서에 기름을 부었다.
◇정부 간 갈등에 민간 감정도 냉각 = 이런 갈등 속에 급속히 진행된 한일관계 악화 양상이 과거보다 심각한 점은 통치집단 간의 관계와 상대국에 대한 양국 대중의 감정이 동시에 나빠졌다는 데 있다.
한국 권위주의 정부 시절 한국민의 대일 감정은 좋지 않았지만, 정권 수뇌부 간에는 긴밀한 교류가 있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2001∼2006년 집권) 총리 시절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와 독도 도발 등으로 양국 당국 간 관계가 냉각됐을 때도 월드컵 공동개최와 `한류 바람' 등을 계기로 양 국민의 거리감은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국 새 정부 출범 이후 정상회담을 한 차례도 갖지 못한 것은 물론 외무장관의 상호 방문조차 성사되지 않을 만큼 당국 간 관계가 악화했을 뿐 아니라 상대국에 대한 양국 국민의 감정도 동시에 나빠졌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달 23일 발표한 '외교 친밀도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의 58%가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대답했고 지난 3∼4월 한국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 시민단체 '언론 NPO'의 공동조사에서 한국 응답자 중 76.6%가 일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고 답했다.
이런 결과는 양국 간 민간교류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올 1∼10월 한국을 찾은 일본인 수는 231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4% 감소했다. 엔저 변수가 있긴 하지만 일본에서 일하는 한 한국 관광업계 관계자는 "반한 감정이 고조되면서 개별 가정과 직장에서 한국으로의 여행을 자제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내각부가 지난달 23일 발표한 '외교 친밀도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의 58%가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다. 사진은 도쿄 거리를 걷고 있는 일본 시민들의 모습. (AP=연합뉴스DB)
한류 붐도 급속히 식어 작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NHK의 연말 가요축제인 홍백가합전에 한국 가수가 초대받지 못했다.
또 박정진 쓰다주쿠(津田塾) 대학 국제관계학과 조교수는 "3∼4학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 관련 세미나 수업의 학생 수가 8∼10명이었는데 올해는 6명에 그쳤고, 자매결연한 한국 대학으로 가겠다는 유학생이 올해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아 재공고를 낸 상황"이라고 말했다.
◇추가 악화 여지·개선 가능성 병존 = 이런 상황임에도 양국관계를 뒤흔들 변수들이 남아 있기에 아직 한일관계가 바닥을 친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있다.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소송과 관련, 일본 기업에 대한 배상 판결을 확정할 경우 양국은 또 한 번 충돌할 수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종결된 사안'이라는 입장인 일본 정부는 배상 판결이 확정되면 국제 분쟁해결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이다. 지금처럼 양국 간 고위급 소통로가 단절된 상황에서 아베 정권이 내년 중 마무리하려 하는 집단 자위권 행사 용인 문제도 양국관계의 중대 변수다.
다만, 지난달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설정 이후 동북아 갈등지수가 높아진 상황에서 한일간 사전 협의를 거쳐 일본이 한국의 방공식별구역 확대를 인정하는 모양새를 연출한 것은 양국 외교·안보 관련 대화채널 복원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이달 초 동북아 3개국 순방 때 한국, 일본에서 각각 양국관계 개선 필요성을 강조하며 중재외교에 나선 것도 양국관계 개선의 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일 전문가 "쟁점현안 해결 위해 양국 모두 할 일 있어" = 전문가들은 앞으로 한일관계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양국 정부에게 각자 할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
외교부 동북아국장 출신인 조세영 동서대 국제학부 특임교수는 "한국 정부는 우선 한일관계의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입장을 분명히 정하는 이른바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2005년 한국의 민간공동위원회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유권해석을 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징용배상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판단을 했는데, 그 입장을 계승한다는 점을 우리 쪽에서 분명히 밝히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조교수는 이어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우리 측 입장을 밝혀놓고 그에 따라 한국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보여준 뒤 일본의 행동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는 "아베 정부는 한국 정부가 중시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적어도 노다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협상했던 수준까지는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양국관계 개선을 위한 당국 간 대화 방식에 대해 실무 당국자 간 대화를 비약적으로 강화하는 방안과 정상회담을 통해 돌파구를 여는 방안이 동시에 제기됐다.
조 교수는 "양국이 정상회담에 집착하기보다는 양국 외교부 장·차관을 포함한 실무 당국자 간 접촉을 지금보다 2∼3배 더 하면 좋겠다"며 "당국 간 접촉의 와중에 논쟁할 것은 하고 합의할 것은 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미야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아베 총리를 만나서 역사인식과 관련한 역대 내각의 담화를 계승한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그럴 경우 아베 총리가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문제 발언이나 야스쿠니 참배 등을 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