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자기사람 심기 없애야… 재판관 임명제·자정 노력을"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헌법재판소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헌재의 전·현직 고위 인사들이 문제였다. 박근혜정부 초대 국무총리와 헌재소장으로 지명됐던 전직 인사들은 기본 자질조차 갖추지 못해 논란거리가 됐고, 현직 재판관은 검찰총장 자리를 기웃거리다 입방아에 올랐다. 헌재 출범 후 25년간 쌓아온 명예와 신뢰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헌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입니다.”
최근 만난 한 헌재 연구관은 이같이 토로했다. 대법원과 구분되는 독립 사법기관의 구성원이라는 자부심이 무너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헌재의 경력을 ‘출세’의 디딤돌로 삼으려는 고위 인사들의 태도가 문제라고 토로했다. 헌재 재판관 자리를 나눠 먹기 대상으로 삼는 정치권도 잘못이라고 말했다.
◆자질 논란과 위상 추락
헌재의 위상 추락을 둘러싼 논란은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선에서부터 본격화했다. 박 당선인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이명박 대통령이 지명한 이 후보자는 지명 41일 만인 지난 13일 전격 사퇴했다. 문제는 이 후보자가 헌재소장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부터 불거진 각종 의혹이 도를 넘은 데다 자진 사퇴를 결정하기까지 ‘조직 공백’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버티면서 헌재의 신뢰 추락을 가져왔다.
특정업무경비 3억2000여만원을 개인 계좌에 입금해 사용한 공금 전용 논란의 경우 이 후보자가 ‘관행’이라며 변명했던 것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동아시아연구원이 2009년과 2011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헌재는 사법기관 중 신뢰도·영향력 측면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후보자를 둘러싼 개인적인 논란이 사퇴까지 이어지면서 헌재의 평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새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던 김용준 인수위원장도 개인적인 문제로 낙마하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제2대 헌재소장을 지낸 김 위원장은 임명 초기 무난히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두 아들 병역기피 문제와 재산 문제 등이 겹치면서 임명 5일 만에 사퇴했다. 도덕성 문제만은 없을 것이라던 예상이 빗나가면서 자질 논란으로 번졌고 결국 헌재까지 타격을 입게 된 셈이다.
◆정치바람 타는 인사들
헌법재판관에 임명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은 안창호 재판관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검증 신상조사에 동의한 것도 헌재를 흔든 악재였다. 독자적인 수사 권력을 갖고 있지만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검찰총장 자리에 독립된 사법기관을 대표하는 헌재 재판관이 지원했다는 사실이 헌재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유일한 외부인사로 검찰총장 후보자 9인에 올랐지만 검찰총장추천위원회 회의 결과 최종 대상자 3인에 들지 못하면서 헌재의 위상은 더욱 추락했다. 과거에도 헌재가 정치권력의 영향 아래 자유롭지 못한 사례는 있었지만 여야의 대립으로 생겼던 일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실제 2006년 헌재소장으로 지명된 전효숙 후보자는 지명 절차와 코드 인사 논란으로 여야가 대립해 자진사퇴했고, 2011년 조용환 변호사의 재판관 임명 당시에도 ‘천안함 발언’ 등을 이유로 한나라당이 반대해 무산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헌재가 여야 정쟁의 도구로 사용된 면이 있고, 헌재 스스로 신뢰성을 훼손하진 않았다는 측면에서 비판의 화살은 정치권으로 향했다.
헌재 관계자는 “과거에도 정치권에 따라 헌법재판관 공백사태가 빚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예전과 상황이 다른 것 같다”며 “검찰총장 인사 검증에 동의하고 소장 지명자가 비리 혐의로 낙마하는 상황은 내부로부터 발생한 위기”라고 말했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헌재가 쏟아지는 비판을 잠재우고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재판관 임명제도 개선과 함께 구성원들의 자정노력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우선 헌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자기사람 심기’에 나서려는 정치권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헌재는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이나 대통령 탄핵심판 기각 결정에서 보듯이 행정부의 정책에 최종적으로 제동을 걸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국회가 지명하는 헌재 재판관 3명 몫이 늘 정쟁의 대상이 됐던 이유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이강국 전 소장이 퇴임하면서 제시한 국회의원 전원이 임명 절차에 참여해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는 독일식이나 재판관 중 호선을 통해 헌재소장을 뽑는 등의 제도 개선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사법기관인 헌재 인사들이 행정부를 기웃거리는 것도 개선돼야 할 사항이다. 헌법재판관이 이후의 자리를 염두에 두고 최종심리를 하게 되면 권력분립과 국가 운영의 기본원칙이 흔들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헌재 관계자는 “우선 하루빨리 새 소장이 임명돼 헌재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며 “긴 호흡으로 낮아진 신뢰를 회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