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 구체적으로 1469만2632표.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받은 득표수다. 이 숫자가 대한민국 진보가 얻을 수 있는 한계일까.
“솔직히 멘붕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던 선거다. 실력으로 졌다.” 12월 20일, 기자와 통화한 한 민주당 초선의원의 말이다. 흔히 한국 정치의 이념지형을 언급할 때 거론하는 것이 ‘기울어진 운동장론’이다. 보수는 위에서, 진보는 아래에서 공을 찬다. 진보는 사력을 다해야만 간신히 공을 넣을 수 있다. 반면 보수는 자책과 실책을 하지 않는 한 골인에 성공한다. 진보 측에서는 공정한 심판관 역할을 해야 할 사정 기관이나 언론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한쪽 편에 서서 플레이어로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2012년 12월 15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유세를 하던 중 예정에 없이
깜짝 등장한 안철수 전 후보가 자신이 매고 있던 노란 목도리를 문 후보에게 둘러준 뒤 함께 두 팔을
들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진보·개혁이 독자로 치러낸 최초 대선
2002년과 1997년의 대선은 기적과 같은 성공이었다. 유력 보수후보와의 단일화가 필수였다.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뤄낸 1997년의 경우, 소위 ‘DJP연합’ 이외에도 보수성향 ‘제3후보’의 완주(이인제 19.2%)까지 더해져 간신히 이뤄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2012년 대선은?
역설적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두 개의 대선과 이번 대선이 구별되는 큰 차이점이 있다. 역대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수의 분열이 필수적이었다. 떨어져 나온 보수와 진보의 연합, 단일화 후보 전략이다. 그런데 이번에 등장한 ‘제3후보’는 안철수다.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밝힌 그의 국정정책은 ‘진보’에 가까웠다. 실제 출마선언 이후 그의 캠프에 결합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진보성향의 학자군과 시민사회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문재인 후보 쪽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세 캠프로 나눠 이번 대선을 진행했다. 민주캠프는 민주당 출신이고, 미래캠프와 시민캠프의 상당수 인사는 진보성향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 결과 나온 정책을 보면 큰 틀에서 2002년 이후 진보정당·시민사회가 내건 이슈 대부분을 흡수했다.
시민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역대 총선과 대선에서 각 정당이 내건 정책·공약을 검증·평가하는 작업을 해왔다. 자체 회원과 전문가를 상대로 중요한 의제를 선정해, 각 후보들에게 질의를 하고 받은 회신을 바탕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고계현 경실련 사무총장은 “사실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내건 공약은 실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문은 남지만 역대 어떤 대선후보보다 시민사회가 기준으로 삼는 진보성·개혁성·변화 가능성의 측면에서 그동안 진보·시민사회 의제와 가까운 것들이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2012년의 대선은 한국 대선 역사상 최초의 ‘진보개혁세력 사이의 후보 단일화’로 역시 보수세력이 총집결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 맞서 호각지세(互角之勢)의 싸움을 벌인 선거라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가 이념정치 성향이 강하다고 보는 것이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서구식 정당정치가 이념에 기반하여 수십년간 확립된 전통이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의 경우는 정당정치의 역사가 짧다. 임 교수는 “한국의 정당정치가 그런 식으로 정착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많은 국민들이 그런 식의 정당정치를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고, 이념에 기반한 정책을 내건 정당을 지지해 그 과실을 받은 경험도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선거 정책이나 공약도 마찬가지다. 역대 선거에서 경험하듯, 선거에서 승리한 세력이 집권 후 정책의 일관성을 지킨 경우는 거의 없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지형이 잣대가 아니라면?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선거 여론조사와 더불어 주기적으로 한국인의 이념성향 분석을 해왔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부소장은 “조사를 해보면 보통 자신을 진보성향이라고 밝힌 유권자가 25~30% 정도이며, 보수라고 정체성을 밝힌 경우가 30~35%, 나머지 40%가량이 중도라고 답하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다”라며 “가령 2007년도를 보면 이명박 후보가 계속 앞서가면서 주관적 이념분포에서 보수가 늘어나는데, 실질적 이념성향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후보의 성향에 따라 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흔히 20대와 30대는 진보개혁, 40대는 스윙보터, 50대와 60대 이상은 보수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지만 이 역시 검토가 필요하다. 대선 전 나온 이야기는 승패는 40대 표심을 누가 잡느냐에서 갈린다는 것이었다. 세대별 투표수를 정확하게 산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관위의 읍·면·동별 최종 결과는 각 후보에 대한 지역별 투표수만 보여줄 뿐이다. 세대 투표 수에 가장 근사치를 보여주는 수치는 대선 투표 당일 출구조사다. 출구조사의 연령별 세부 투표율을 보면 40대에서 문재인 후보가 55.6%,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44.1%를 얻었다. 문재인 후보는 40대 표심을 잡고도 패배했다. 이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념보다 더 중요한 지역·세대변수
세대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매번 대통령 선거 때마다 각 세대 구성원의 절반이 윗 연령층 세대로 이동한다. 정승일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현재의 50대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한가운데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다. 역설적으로 독재라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왜 박근혜에 보다 기울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진보개혁진영이 이번 대선에서 세대전략, 특히 10년 전 대선에서 40대였던 현재의 50대를 잡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현재의 야권, 진보개혁이 얻을 수 있는 투표수의 최대치는 1469만여표일까. 그렇지 않다. 아직 한국의 유권자는 이념보다 지지하는 인물의 성향을 따라간다. 세대는 정교한 세대전략을 마련하면 확장 가능하다. 지역 변수가 거론되기도 한다. 현재 한국의 보수와 진보세력이 근거하고 있는 지역별 인구수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진보가 질 수밖에 없는 구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도 전제되어야 할 것은 한국의 정치지형이 현재와 같이 고착된 것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라는 사실이다. 당시 집권여당인 민자당으로 YS가 합류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크게 봐서는 ‘승자독식 치킨게임’을 특징으로 하는 87년 체제의 산물이다. 임운택 교수는 “결선투표제의 도입이나 비례대표의 확대 등 정치지형이 바뀐다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밖에 없는 변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