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안철수 지지층이 적대적 이분법을 깨뜨렸다

  • 2012-09-18
  • 정한울 (월간중앙)
불확실성과 역동적 변화가능성 여·야 모두에서 발현돼… 유권자 3분의 1이 부동층

 

선거가 9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권의 후보는 이미 정해졌는데 야권의 후보는 아직 미완성이다. 민주통합당이 문재인 고문을 대선후보로 선출했지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후보단일화 과정이 남았기 때문이다.2000년대 이전의 대선에서는 대결구도가 일찌감치 확정됐었다.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여·야의 후보가 5월에 결정됐다. 민자당은 김영삼 후보, 민주당은 김대중 후보를 선출했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도 신한국당은 7월, 새정치국민회의는 5월에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를 각각 선출했다. 그해 봄부터 이미 전국은 대선모드로 후끈 달아올랐다. 2000년대 이전까지의 대선은 상당히 예측가능한 방향으로 선거가 치러진 셈이다. 2000년대 들어 양상이 달라졌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4월에노무현 후보를, 야당인 한나라당은 5월에 이회창 후보를 선출했으나 제 3지대에 유력한 정몽준 후보가 버티고 있었다 ( [그림1]참조).

 

불안정한 구도로 선거판이 짜여지면서 16대 대선은 역대 대선 중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해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패배하자 노무현 후보 책임론이 불거지고, 후보 교체론까지 등장했다. 월드컵 4강 열기는 정몽준 후보를 급부상시켰다.4~5월까지 40~50%를 넘나들던 노무현 후보 지지율이 이후 20%대로 급락하고, 8~9월에는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를 지지율에서 앞섰다. 이에 노무현 후보가 후보단일화라는 승부수를 던져 11월 25일 여론조사로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함으로써 야권의 대표주자로 나서 대선 승리을 거머쥐었다.

 

5년 전 2007년 대선은 또 다른 의미에서 불확실성을 키웠다[그림2]에서 확인되듯 8월 20일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누르고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시점으로 보면, 이명박 후보 지지율과 박근혜후보 지지율을 더하면 60~70%가량이었다. 8월 20일이 실질적인 17대 대선 선거일이었던 셈이다.그러나 당시...[기사전문 보기]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여론분석센터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