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앞에만 놓인 재떨이 절대권력 장악했음을 보여줘
2003년 北 경제개혁 총괄했던 박봉주, 경공업 책임자로 복귀
金의 결심과 朴의 정책 결합하면 북한 경제성장과 변화 가능할 것
그러나 내 시선은 곁의 부인보다 김정은 앞에 놓인 재떨이와 담배, 라이터에 있었다. 김정은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 흥미로웠던 것은 아니다. 공연에 참석한 수백 명의 관중은 물론 옆 자리의 고모부 장성택이나 73세의 당비서 김기남의 앞에도 없는 재떨이가 그의 탁자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 사진을 보면서 20여년 전 당시 대우그룹 사장단과 내가 근무하던 KDI(한국개발연구원) 박사들 간의 토론회가 떠올랐다. 김우중 회장이 '땅에서 경제 만들기를 하는 사람들'과 '구름 위에서 경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한국 경제에 대해 난상토론을 해보자고 제안해서 이루어진 회의였다. 커다란 홀에 양측이 서로 마주 보는 배치였다. 대우 측의 한가운데는 당연히 김 회장의 자리였고, 그의 좌우와 뒤로 서열에 따라 수십 명의 사장이 포진했다.
그런데 김 회장의 탁자에만 재떨이가 있었다. 회의 중에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래서 휴식시간만 되면 회의장 밖은 사장들의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재벌 총수는 왕'이었고, 재떨이는 '절대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래서일까, 김정은 앞에만 놓인 재떨이 역시 내겐 최고지도자의 위상을 과시하는 심벌로 다가왔다. 게다가 나이 어린 사람이 윗사람 앞에서 담배를 문다는 것은 예절에 크게 어긋난다. 이는 우리보다 북한에서 훨씬 더 심하다. 결국 아버지, 할아버지뻘 나이의 원로들 앞에서의 재떨이는 이미 김정은이 절대권력을 확고히 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7월 3일 김정은의 평양양말공장 현지지도 사진이었다. 김정은의 바로 옆에는 조선노동당 경공업부장 박봉주가 있었다. 내겐 퍽 반가운 얼굴이다. 2002년 가을 박봉주가 '경제고찰단'의 일원으로 남한을 방문했을 때 내가 그의 안내를 맡았던 까닭이다.
사진 속의 그는 손에 수첩을 들고 있었다. 화학공업상이었던 10년 전에도 그랬다. 8박9일의 일정으로 남한 경제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내내 그는 수첩에 메모를 했다. 아마도 방문 기업에 대한 소감, 특기할 만한 사항, 북한 경제에 활용할 아이디어 등이 수첩에 담겼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질문이 많았다. 겉보기에는 마음씨 좋은 시골 농부 인상이었지만, 틈만 나면 경제에 관해 물었다. '고찰단(考察團)'이란 명칭에 대해서 묻자 "시찰단은 거저 놀러 다니는 거고, 우린 집중해서 연구하러 온 거니까 당연히 고찰단이라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네까"라고 답했던 그는 실무에도 매우 능통했고, 북한 경제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박봉주는 2003년 총리에 임명되었고, 북한의 경제개혁 작업을 총괄했다. 그러나 2007년 봄 돌연 해임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의 개혁적인 조치들이 강경 군부의 반발에 부딪힌 탓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실각과 함께 북한의 경제정책은 보수화 경향을 보였다. 그랬던 그가 김정은의 최측근 수행자로 복귀한 것이다. '인민생활 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김정은 체제에서 그 핵심인 경공업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여전히 손에는 수첩을 들고.
지난 4월 6일 김정은은 당 중앙위원회 간부들과의 담화에서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는 구호를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라는 그의 주문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본 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나는 그 가능성을 김정은의 담배와 박봉주의 수첩에서 읽는다.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최고지도자의 세계를 향한 대담한 결심과 실무 책임자의 수첩에 빼곡히 적혀 있을 정책 아이디어가 결합한다면 북한 경제의 성장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4월 15일 김정은이 최초의 공개연설에서 "북한 주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한 다짐도 쉽게 실천될 것이다. 그날은 '쌀밥에 고깃국'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한 김일성의 100회 생일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업(遺業) 완성과 자기 시대의 성공적 출발 여부가 그의 결심 하나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