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아침논단] 아직은 필요 없는 '통일 항아리'

  • 2012-04-23
  • 조동호 (동아일보)

'통일의지 모아 통일비용 56조 적립' 그럴듯 하지만 피부에 와 닿지 않아

막연하게 통일 이후 필요한 돈보다 통일 만들어가는 작업이 더 중요

국방력 강화, 북한 영유아 지원, 통일 교육, 통일 인력 양성이 시급

 

어감(語感)이 좋은 단어들이 있다. 그래서 들으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 있다. 어감이 주는 느낌 자체로 인해 감히 반박하기 어렵다. 내용을 듣기도 전에 "당연하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준비'라는 단어도 그중의 하나이다.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면 반대하기 쉽지 않다. 일이 닥치기 전에, 그래서 후회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자는데 그 누가 "그럴 필요 없다"고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으랴.

 

그러나 그렇지 않다. 준비라고 해서 늘 좋은 것은 아니다. 준비도 해야 할 시기가 있는 까닭이다. 아무 때나 준비한다고 해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적절한 시기를 맞추지 못하면 준비가 오히려 부담되고 낭비가 될 수 있다. 예컨대 누구나 죽기 마련이라고 해서 젊은 날에 수의(壽衣)를 준비하진 않는다. 수십년 후의 죽음보다는 내일의 출근이 더 중요하므로 수의를 준비할 돈이 있다면 당장 입을 옷을 장만하는 편이 낫다.

 

통일부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 항아리 구상도 마찬가지다. 통일부의 표현을 빌리면, "실질적인 통일 준비를 하는 차원에서 전 국민의 통일의지를 결집하여 통일비용을 모을 수 있는 통일 항아리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물론 진짜 항아리를 만들자는 것은 아니고 통일계정을 설치하자는 이야기다. 통일에는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니 지금부터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돈을 모으자는 뜻이다. 약 56조원을 적립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래서 통일부는 올해의 정책 기조를 '통일준비'로 정하기도 했다.

 

얼핏 듣기에, 그럴듯하다. 좋은 생각이라고 느껴진다. 미리 준비하자는 말이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결국 통일이 될 테니까. 하지만 과연 지금이 통일비용 준비를 시작해야 할 적절한 시기일까. 통일준비는 돈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명확한 답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통일 항아리가 설득력을 지니고, 국민들의 자발적인 성금도 가능하다.

 

그러나 통일은 아직 멀리 있어 보인다. 재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세(稅)를 거론했지만, 뜬금없는 제안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국민에게는 통일이 피부에 와 닿는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 체제의 등장이라는 커다란 변화가 북한 내부에서 벌어졌지만, 혼란의 징후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예측보다 빨리 확고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실의 통일은 북한의 붕괴에서 비롯될 것이지만, 아직 북한의 붕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북한이 갑자기 붕괴할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이 '영(零)'은 아니다. 이 대통령의 발언처럼 통일은 도둑같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통일은 우리가 바라는 통일이 아니다. 우리가 통일을 원하는 이유는 전체 한민족의 삶의 질을 한 단계 격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분단으로 인해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우리 민족의 발전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통일을 희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수단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통한 통일은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하고, 통일 이전에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통해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야 한다. '빠른 통일'이 아니라 '바른 통일'이 더 소중하고, 통일만큼이나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은 막연한 통일 이후에 필요할 돈을 모으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통일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통일 항아리에 넣을 돈이 있으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국방력 강화에 쓰는 것이 더 급하다. 통일시대의 한 주역이 될 북한 영유아를 위한 영양 지원에도 써야 한다. 통일의 필요성을 잊어가는 우리 청소년들에 대한 통일교육을 확충하고, 통일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에 사용할 예산도 부족하다.

 

게다가 통일비용은 미리 쌓아놓아 봐야 통일 시점에서는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하다. 북한 붕괴가 알려지는 순간 국내에서는 극심한 사재기가 벌어지고 투자는 크게 위축될 것이다. 금융·주식·외환시장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결과 큰 폭의 인플레이션은 불가피하다. 결국 56조원을 적립해도 실제 가치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통일 항아리는 아직은 필요 없다. 미래의 언젠간 통일이 될 것이고 통일비용이 필요할 터이니, 그때 '통일재원을 만들기 시작했던 정권'으로 기억되겠다는 정치적 욕심이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