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아침논단] 북한의 '文身'

  • 2012-02-19
  • 조동호 (조선일보)
본인이 지워야 하는 문신처럼 北 변화 스스로 결정하는 것

김정은, 경제 살려야 3代 세습 명분 세울 수 있어…

北 안심하고 개방하도록 우리 대북정책 '진화' 필요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MB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난 정부들과 똑같다. 흔히 두 정책은 반대라고 이야기되지만, 그것은 외견상의 문제일 뿐이다. 북한 인식론 차원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햇볕으로 옷을 벗게 만들겠다던 DJ·노무현 정부나 바람으로 옷을 벗기겠다는 MB 정부나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란 뜻이다.

 

북한을 둘러싼 것은 실제론 '문신(文身)'이었다. 얼핏 보고 옷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어차피 햇볕으로든 바람으로든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포용이든 압박이든 외부에서 변화를 만들겠다는 정책은 순진한 기대에 불과했고, 애초부터 성공하지 못할 것이었다.

 

문신은 본인이 지워야 한다. 변화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속도와 범위에 대해 다른 사람이 조언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방향으로의 선회 자체는 자신이 판단해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사정이 어려운 북한이라고 해도 옆에서 강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수십 년을 '우리 식 사회주의'의 후계자로, 또 최고지도자로 버텨온 김정일이 외부의 영향 탓에 변화를 결심하리라고 기대한 것은 무망(無望)한 일이었다. 그래서 문신을 옷으로 잘못 인식한 햇볕과 바람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정부든 정책의 효과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김정은의 북한이 출범한 것이다. 아직은 상중(喪中)이지만, 조만간 그는 자신의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 시대의 새 지도자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마련이다. 어떤 용어로 표현되든, 김정은의 비전은 경제와 맞닿은 것일 수밖에 없다. 경제강국을 통한 강성대국의 달성이라는 아버지 시대의 유업(遺業)을 관철해야 하기 때문이다. '쌀밥에 고깃국'으로 상징되는 경제난 해결은 할아버지 시절부터의 유업이기도 하다. 결국 경제를 살려야 3대 세습의 정치적 명분이 보장되는 상황이다.

 

김정일 사망을 알린 북한의 보도 역시 김정은이 경제 살리기에 나설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3700자에 달하는 보도문은 "사상강국, 군사강국을 이룬 김정일이 경제강국을 위해 초강도 현지지도를 다니다가 겹쌓인 피로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결국 경제강국의 추진이 바로 유훈통치의 시작이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원로 그룹의 노선 시비를 근본적으로 잠재울 수 있는 길이다. 김일성의 '주체(主體)'가 사상강국, 김정일의 '선군(先軍)'이 군사강국을 알리는 슬로건이었다면, 김정은은 경제강국을 향한 슬로건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북한 일반 주민들로부터의 지지 획득을 위해서도 김정은은 경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비록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권력 심층부가 동의했다고 해도, 일반 주민에게 그는 능력이 의문시되는 '애송이'일 뿐이다. 따라서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 결국 먹고 사는 문제의 진전을 보여주는 것만이 김정은이 최고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는 방법이다. 민생 챙기기가 그의 시대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핵심 전제가 되는 것이다.

 

경제 살리기, 민생 챙기기는 개방(開放)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자립경제라지만 자립의 기반은 무너졌고, 계획경제라면서 계획도 못 세우는 실정인 탓이다. 당연히 경제성장과 민생 향상을 위한 내부 재원(財源)은 없다. 그래서 외부 자본의 확보를 위한 개방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게다가 중국의 지원이 절실한 김정은으로서는 수년 전부터 지속되는 중국의 개방 요구를 무시하기 어렵다.

 

체제 불안정을 초래할 개방을 김정은이 선택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개방·개혁을 안 하면 북한이 무너지고, 개방·개혁을 하면 정권이 붕괴할 것이라는 김정남의 말도 같은 뜻이다. 그러나 해도 망하고 안 해도 망한다면, 해보고 망하는 길을 택할 가능성이 훨씬 큰 법이다. 남들은 다 망했어도 나는 다르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더욱이 나이가 어려서 자신감이 넘칠 김정은은 더 그럴 것이다. 따라서 체제 자체의 전환이라는 위험한 개혁은 늦추더라도, 체제 내에의 변화라는 덜 위험한 개방은 시간문제다.

 

물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더라도 실제 결단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가보지 않은 두려운 길인 탓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의 북한이 안심하고 개방을 선택하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문신 없이도 살 수 있구나, 문신이 없어야 더 잘살 수 있구나"라고 북한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정책이 있어야 한다. 햇볕이냐 바람이냐의 부질없는 논란에서 벗어나 우리 대북정책도 복합(複合)으로의 진화가 필요하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