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안철수로 시작해 안철수로 끝난 선거? No!

  • 2011-10-31
  • 이철희 (주간조선)
안철수가 경계해야 할 역설 있다

 

▲ 지난 10월 24일 서울 안국동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를 방문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왼쪽). photo 연합뉴스
우화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비관주의자는 동굴의 어두운 입구를 본다. 낙관주의자는 동굴 끝의 빛을 본다. 좋은 비유, 그런데 여기서 끝이면 재미없다. 예상대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현실주의자에 대한 비유다. 현실주의자는 입구와 빛 그리고 또 다른 동굴까지 본다.

 

이 세 가지 비유는 선거를 대할 때 아주 좋은 준거가 된다. 10·26 서울시 보궐선거로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지만 패했다고 낙담할 일도, 이번에 졌으니 또 질 거라 절망하는 것도 없다. 이겼다고 너무 환호할 일도, 이번 승리로 다음 선거에서도 이길 거라 착각할 것도 없다. 이겼든 졌든 또 다른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이런 현실주의의 관점이 정치나 선거에서 꼭 필요하다. 성패는 엇갈리고, 진퇴는 주고받아야 세상 이치가 공평한 것 아니던가.

 

흔히 10·26 선거의 최대 승자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지목한다. 맞는 말이다. 분명 안철수는 이번 선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실시가 확정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혜성같이 등장했다. 그러더니 웬걸 6일 만에 바람같이 사라졌다. ‘6일 돌풍’ 끝에 그가 매직(magic)을 부렸다. 5%대 지지율에 불과하던 난쟁이 후보(박원순)를 50%대의 유력 후보로 밀어 올렸다. 자신의 인기로 다른 사람을 당선시키는 힘을 흔히 후광효과라고 하는데, 그가 보여준 후광효과는 대단했다.

 

대단한 후광효과

 

선거 중간, 안철수의 매직이 다시 등장했다. 그즈음 박원순 지지층의 결속이 느슨해지고, 나경원 지지층은 반대로 결집했다. 이런 경우 통상 지지율이 ‘붙었다’고 한다. 이때 안철수는 다시 박원순에게 힘을 실어주는 메시지를 던졌다. 투표일 이틀 전인 10월 24일 깔끔한 매직쇼를 펼쳤다. 박원순 선거캠프를 찾아가 편지를 전했다. ‘투표에 참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로써 그는 일거에 박원순의 승리를 안철수 효과로 규정해 버렸다. “타이밍이 전부”라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말에 딱 맞는 탁월한 정치감각과 행보였다.

 

과연 이번 선거는 안철수로 시작해서 안철수로 끝났나? 아니다! 이번 선거는 안철수가 없었더라도 야권이 어렵사리 이길 선거였다. 어차피 전임 시장 오세훈의 과욕과 착각으로 인해 생겨난 선거였다. 이 사실만 기억해도 성패를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국민적 대세가 된 반MB 정서는 또 어떤가. 날로 강해지는 20~30대의 투표 행동주의(vote activism)도 있다. 이쯤 되면 좀 과하게 말해 누가 이길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그러니 안철수 때문에 성패가 갈린 것은 분명 아니었다.

 

선거 과정을 보더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난 대선 한나라당은 BBK를 물고 늘어지는 야권을 네거티브 정치로 규정해 지독하게 몰아세웠다. 그런 한나라당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네거티브를 들고 나왔으니 국민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가증스럽고 한심해 보였으리라. 네거티브는 안 그래도 싫은 한나라당이 더 밉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대통령 재임 중에 치러지는 선거에서는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 성향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런 판에 네거티브를 했으니 불난 데 기름 부은 격이었다.

 

뿐이랴. 후보 간 지지율 격차가 줄어들자 그걸 네거티브 공세의 효과로 착각한 것은 또 어떤가. 사실 선거 초반 야권 후보의 강세는 안철수의 등장, 민주당 경선, 야권 단일후보 경선 등이 일찌감치 관심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이때 한나라당은 한가했다. 거품이 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단기 급상승한 주가처럼 이 경우에도 조정은 불가피했다. 이즈음에 뒤늦게 출발한 여권의 캠페인이 본격화되고, 히든카드 박근혜마저 등장했으니 느슨했던 여권 지지층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지지율 격차가 줄어들었다. 사정이 이랬는데도 한나라당은 이것이 네거티브의 효과인 것처럼 오판했다.

 

백 보 양보해서 설사 네거티브의 효과가 발생했더라도 그들의 무능은 가려지지 않는다. 야권 후보의 지지율 하락이 자당 후보를 못낸 민주당 지지층의 공허감을 부추겨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일시적 이완에 그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선수’라면 자신들의 공세가 거칠어져 전선이 예각화됨에 따라 이완된 야권 지지층이 다시 모여들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아직은 박근혜 대 반(反)박근혜 구도

 

네거티브 공세는 언제든지 역풍을 맞을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선거를 아는 사람의 상식이다. 특히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 흠이 발견되면 역풍은 치명적이다. 선거 중반을 넘기면서 한나라당 후보에게 ‘1억 피부미용’ 건이 터졌다. 이로써 네거티브 공세는 부메랑이 되어 한나라당을 덮치게 됐다. 이 또한 그들은 ‘예상과 달리’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판에 승리를 기대했다면 그건 봉사 문고리 잡기 전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반론할 수 있다. 선거구도상 누가 이길지 예측 가능한 선거였다손 치더라도, 어쨌든 선거를 통해 안철수 대 박근혜의 구도가 정립된 것 아닌가? 일리가 있다. 선거 직후 쏟아진 언론의 분석을 보면 이런 시각이 정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답은 이번에도 ‘아니요!’다. 아직은 박근혜 대 반(反)박근혜 구도로 보는 게 맞다. 아직 튼튼하고 검증된 지지 기반을 가진 후보는 박근혜밖에 없기 때문이다. 혹자의 비유에 의하면, 박근혜는 ‘대세론·현찰’로 표현하고 안철수는 ‘대망론·어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겠다.

 

안철수는 아직 자신의 정치적 실체를 분명하게 정립하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초 박원순과의 단일화 자리에서 읽은 메시지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한 부분뿐이었다. “더불어 경쟁으로 살아가는 미래 세대들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주지지층인 20~30대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관심과 격려일 뿐이다.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풀겠다는 해법에 대한 언급은 없다. 메시지라기보다는 덕담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아직 뭔가 부족한 정치감각

 

지난 10월 24일의 편지에선 그래도 조금 더 나갔다. “저는 지금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변화의 출발점에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시장선거는 부자 대 서민, 노인 대 젊은이, 강남과 강북의 대결이 아니고,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은 더더욱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만은 이념과 정파의 벽을 넘어 누가 대립이 아닌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누구의 말이 진실한지, 또 누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 선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55년 전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처럼 우리가 ‘그날의 의미를 바꿔놓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거 참여야말로 시민이 주인이 되는 길이며, 원칙이 편법과 특권을 이기는 길이며, 상식이 비상식을 이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잘 정리된 표현이고, 선거 막판에 긴요한 맞춤형 메시지다. 다시 한번 안철수의 정치감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뭔가 좀 부족하다. 투표하라는 것 외에 임팩트가 강한 소구점이 부족하다. 선거라는 시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는 하나, 강연 등을 통해 안철수가 던지는 메시지는 공감은 있으나 각이 없다. 대체로 두루뭉술하다.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도달할 것인지,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등에 대한 담론이 없다. 막스 베버의 표현을 차용하면, 지도자가 가져야 할 책임윤리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 선거를 통해 안철수는 정치적 행보를 시작했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정치적 행위자(actor), 그것도 주요 행위자로 자리 잡았다.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많이 얻었다. 잃은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어림잡아 서너 번의 행위만으로 너끈히 야권의 지지율 1위 후보, 양강(兩强)의 자리에 올랐다. 아마 물밑에서는 그에게 줄을 대려는 접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당을 만들자는 기획에서부터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 일약 승천하는 용처럼 벼락같이 대권을 쟁취해야 한다는 무협지적 상상까지 유혹에 유혹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구도에 집중하라

 

정치에서도 사실 공학이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어떤 로드맵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치밀한 이해타산이 뭐 나쁘랴. 굳이 손사래를 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승리를 절대명제로 상정해 놓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덫이 된다. 정치적 승부의 시작과 끝은 본인이다. 기술로서의 정치를 본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자신의 진면목은 사라진다. 가상의 이미지만 난무할 뿐이다. 그러면 승리하기 어렵다. 결국 돈을 좇으면 돈을 벌 수 없듯이, 승리에 집착하면 승리하기 어렵다. 안철수가 경계해야 할 중요한 역설이다.

 

안철수는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의 등장으로 박근혜로선 또 한번의 도전이 불가피하게 됐다. 국민적 신망을 잃은 MB(이명박 대통령)와 낡은 한나라당을 혁신하는 것이다. 천막당사 시절의 결기를 되찾는 게 급하다. 무용한 네거티브와 철 지난 색깔론을 아직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구태를 걷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개혁적 보수로 탈바꿈시킬 때 박근혜의 취약한 확장성은 해결될 것이다.

 

야권은 성을 쌓기보다 길을 내야 한다. 안철수의 등장을 활력소로 삼아야 한다. 손학규·문재인·안철수가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경쟁을 펼친다면 야권의 정권 탈환 가능성은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이들이 공통으로 감당해야 할 짐은 혁신과 통합이다.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 등 전국 선거에서 내리 3연패하게 만든 요소들을 일소해야 한다. 야권통합도 해야 한다. 진보의 분립과 정체(停滯)를 통합과 혁신으로 정면돌파해서 이른바 통합적 수권정당, 또는 혁신적 통합정당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게 인물 경쟁을 넘어서는 필승의 구도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급해졌다. 안철수의 등장으로 가장 많은 숙제를 받았다. 그의 등장으로 민주당 내 대권주자들의 키는 작아져버렸다. 통합 담론을 잘못 구사해 야권의 다른 세력에 대해 계속 밀리는 형세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민주당이 지금처럼 위축돼서 통합이 이뤄진다면 그 통합은 지지 기반의 통합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상층 통합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25% 내외의 민주당 지지층이 기꺼운 마음으로 통합에 동의하고, 통합정당을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민주당이 혁신을 통해 새롭고 젊은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

 

정당 혁신의 내용은 제도를 개선하고, 정책을 일신하고,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인적 물갈이, 세대교체다. 민주당은 노쇠하다. 동아시아연구원의 올해 9월 조사에 의하면, 민주당이 국민에게 더 신뢰받는 정당이 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로 48.5%가 당 내부의 자성과 개혁 방안 마련, 즉 혁신을 꼽고 있다. 범진보세력과의 연대는 8.4%에 불과하다. 민주당이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1 대 1 구도의 정립, 아주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통합만이 능사는 아니다. 통합도 구태·안일·정체를 벗어던지는 혁신적 통합이 돼야 한다. 야권 각 당의 혁신도 각자도생이 아닌 통합적 혁신이 돼야 한다. 이렇게 되면 손학규·문재인·안철수 중 누가 나가도 이긴다. 그렇다면 이런 명제가 도출된다. ‘당분간 인물은 잊고, 구도에 집중하라.’ 안철수에게 이런 명제가 좋겠다. ‘안철수 현상은 인물 우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도효과다.’

 

이철희 민주정책연구원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