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년여 동안 2012년 대통령선거를 향한 여론 판도의 흐름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안 교수의 출현 이전에는 압도적인 단독 선두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나 홀로 레이스’였다면, 그 이후엔 박 전 대표의 지지 세력과 박 전 대표를 지지하지 않는 비박(非朴) 세력의 정면충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 대선에 영향을 미칠 변수들과 관전 포인트가 상당히 다양해지고 있으며 승부 방정식의 해법(解法)도 갈수록 난해해지고 있다.
무당파(無黨派)의 선택
무당파가 내년 대선 정국의 핵(核)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규모의 증가뿐 아니라 예전과는 달리 이들의 투표 참여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 때문이다. 과거의 무당파는 정치적 선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이들도 “정치를 바꾸기 위해 투표에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높다.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 여론조사에서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무당파는 50.6%에 달해, 한나라당 지지층(64.1%)보다는 낮았지만 민주당 지지층(49.4%)보다 높았다.
무당파가 ‘안철수 바람’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변화의 주도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도 관심을 끈다. 지난 9월 갤럽 조사에서 여(與)도 야(野)도 아닌 ‘제3후보’를 표방한 안철수 교수의 지지층은 무당파가 58%로 다수였다. 무당파가 기존 정당의 외부에서 대안을 찾는 변화의 중심세력이란 조사 결과다.
하지만 무당파의 증가가 앞으로도 제3후보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할 것으로 보긴 어렵다. 무소속인 박원순 후보가 민주당·민노당과 함께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사례에서 보듯이 내년 대선에서도 제3후보는 ‘무당파의 희망’에서 ‘진보 정당의 대안’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에는 무당파가 일방적으로 ‘진보 정당의 대표주자’에게 지지를 보낼 확률은 낮다. 무당파는 보수 정당이 보수적 대중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진보 정당이 진보적 대중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정당 체제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런 변화의 요구에 성의있게 반응하는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역대 모든 선거와 마찬가지로 내년 대선도 여·야 정당 간 치열한 ‘중도(中道) 쟁탈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보수와 진보 유권자들의 여·야 지지행태가 각각 뚜렷한 가운데 중도층이 캐스팅 보트를 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도층은 영원히 ‘정치 마케팅’의 중요한 대상이다. 특히 최근 들어 중도층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인 것을 감안하면 ‘중도 쟁탈전’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치열해질 전망이다.
중도(中道)로 수렴하는 이념 성향
동아시아연구원과 한국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이념성향 분포는 2007년 대선 직전에는 보수(43.3%)>중도(34.2%)>진보(22.5%)였지만, 2011년 9월에는 중도(44.5%)>보수(30.0%)>진보(22.4%)로 크게 바뀌었다.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의 국민 이념성향 조사 등 다른 조사에서도 지난 4년 동안 중도층의 급증과 보수층의 감소, 진보층의 정체 현상이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유권자는 반작용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특정 성향의 정파가 집권을 하면 반대쪽 방향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보수 성향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보수에서 중도로 옮긴 유권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한규섭 서울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중도층이 늘어난 것은 무당파의 증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유권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 또는 정치인이 없다고 생각할수록 스스로를 중도라고 여기는 경향이 많다”고 했다. 지난 9월 미디어리서치가 실시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안철수 교수의 가상 양자 대결 조사에서 두 사람은 45.2% 대 41.2%로 오차 범위 내의 박빙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유권자들의 이념 성향별로는 보수층에선 박 전 대표에 대한 지지가 60.7%, 진보층에선 안 교수에 대한 지지가 61.1%로 각각 과반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중도층에선 박 전 대표(42.5%)와 안 교수(42.4%)의 지지율 차가 불과 0.1%포인트였다. 내년 대선 향방 예측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중도층의 표심(票心)이 어느 쪽에도 치우쳐 있지 않고 팽팽하기 때문이다.
세대 균열의 부활
지역주의의 약화
여당으로 가장 뼈아픈 대목은 민심의 풍향계 역할을 하는 40대의 ‘변심’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선 40대에서의 압도적 우세를 바탕으로 손쉬운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후 2010년 지방선거를 비롯한 각종 선거에서 40대의 다수가 야권 쪽으로 돌아섰다. 정재기 숭실대 교수(정보사회학)는 “20·30대 젊은층과 50대 이상 노·장년층의 정치적 성향 차이가 커지면서 40대의 선택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며 “상황에 따라 유·불리를 정밀하게 계산하며 지지 정파를 바꾸는 40대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전략이 대선 승부에 결정적일 것”이라고 했다.
최근 우리 사회의 핵심적 갈등으로 지역주의를 꼽는 전문가는 별로 없다. 그 대신 사회 양극화와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지역주의 약화의 징후는 작년 6·2 지방선거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한나라당의 지역 기반인 경남에서 무소속의 김두관 후보가 당선되고 부산에서는 45%의 지지를 얻은 민주당의 김정길 후보가 선전했다. 최근 미디어리서치 조사에서도 영남 민심의 변화가 보인다. 박근혜 전 대표와 안철수 교수의 가상 양자대결 조사에서 부산·경남에선 49.6% 대 36.1%였고 대구·경북에선 54.1% 대 33.8%였다. 한나라당의 텃밭인 영남에서 야권 후보로 거론되는 안 교수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3명 중 1명 이상인 셈이다. 이 같은 ‘영남 민심의 변화’로 대표되는 지역주의 약화의 수혜자는 당연히 야권이다. 특히 여권을 향한 부산·경남지역의 민심 이반(離反)은 심각할 정도란 게 그쪽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 의원들의 의견이다.
영남 쪽보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호남에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작년 지방선거에서 광주·전남·전북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은 모두 두 자릿수인 13∼18%를 득표했다. 표수를 합치면 35만표로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같은 지역에서 얻은 23만표보다 12만표가 많다. 최근 미디어리서치 조사에서 호남권의 박 전 대표와 안 교수 가상대결 지지율은 34.5% 대 48.7%였다. 야권의 철옹성 같았던 호남에서도 박 전 대표의 지지 표가 3분의 1을 넘고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내년 대선은 지역주의 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가 구축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박 전 대표와 안 교수의 ‘가상’ 대결이 아니라 현실에서 맞붙는 전초전의 성격을 띠게 될 전망이다. 곧이어 내년 초부터는 여·야 대선주자들이 본격적인 대선 정국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 ‘정치에 관심이 높은 무당파’가 증가하고 지역주의와 이념 갈등의 구도에서 벗어나려는 유권자들이 늘고 있는 새로운 시대 상황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적응하는 쪽이 2012년 대선 시장(市場)에서 유권자들에게 쓸 만한 ‘상품’으로 선택받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