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진로문제와 직결된 원내대표 경선이 갑론을박 끝에 2일에서 6일로 연기된 것도 알고 보면 바로 ‘박근혜 역할론’ 때문이다.
사실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이 불거져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각종 선거에서 패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박 전 대표가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소리의 크기가 다르다.
이번에는 수도권 출신 친이계 의원들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사실 당 쇄신책으로 특정인을 간판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다.
쇄신책이라면 마땅히 당의 정책방향이나 당의 인사쇄신 및 당.정.청의 관계 등을 논의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역할론’에 무게가 실리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우선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너무 깊다. 따라서 당이 제 아무리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변하겠다’고 그럴듯한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해도 국민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나라당 모습이 그래왔기 때문이다.
실제 여당은 각종 선거에서 패할 때마다 이런 저런 방안을 쇄신책이라며 국민들 앞에 내놓았지만 지켜진 게 별로 없다. ‘민본 21’소속 소장파 의원들 역시 처음에는 제법 올바른 주장을 펼치다가도 흐지부지 시킨 사례가 어디 한 두 번인가.
이런 상태에서 여당이 그럴듯한 쇄신책을 발표한다고 해도 국민들은 콧방귀도 꾸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여당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반면 국민들은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서는 상당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실제 지난해 중앙SUNDAY와 동아시아연구원(EAI), 한국리서치가 공동으로 실시한 ‘제2차 파워 정치인 신뢰도ㆍ영향력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은 현 정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정치인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으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를 꼽았다.
또 지난 3월 YTN이 중앙일보, 동아시아연구원과 공동으로 한국리서치에 의뢰, 여론조사 한 결과 역시 박근혜 전 대표가 모든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믿지 못하지만 박 전 대표만큼은 믿을 수 있다는 게 현재 국민의 마음이다.
따라서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실질적인 대표가 되어 “앞으로 잘 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국민들은 그 약속을 믿고 한나라당을 다시 한 번 지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나라당 내부에서 쇄신논쟁의 방향이 박근혜 역할론으로 귀결되는 것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박 전 대표가 “믿어 달라”고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믿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박 전 대표가 당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지 여부를 먼저 판단 할 것이다.
가령 당이 당장 내년 총선만을 의식해 박 전 대표를 ‘허수아비 대표’로 만들어 놓는다면, 즉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제한된 대표직을 맡긴다면 국민들도 한나라당을 믿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이군현 의원의 ‘생뚱맞은 공동 대표론’도 역시, 박 전 대표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란 점에서 신뢰받지 못하는 쇄신안에 불과하다.
따라서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은 전적으로 ‘백지수표’와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만 한나라당과 청와대 및 정부의 관계가 올바르게 설정될 수 있을 것이고, 당의 전폭적인 인적쇄신도 가능 한 것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게 될 경우, 박 전 대표는 계파를 초월하는 탕평책을 써야 한다.
친이계가 그동안 모든 것을 독식했던 모습과 똑 같은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만 지금까지 온갖 권세를 누리며 당에 해악을 끼쳐온 몇몇 인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한나라당 쇄신논쟁이 ‘박근혜 역할론’으로 매듭을 짓게 될지, 또 그럴 경우 박 전 대표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