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硏 연속강좌 '역사 속의 젊은 그들'] 조선은 禽獸로 여기던 '서양'을 어떻게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였나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新세계질서를 논한 그들…
"서양을 주인공으로 인정하되 주연 자리는 양보할 수 없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 강의
국제정치학자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지난 3일 시작한 동아시아연구원(원장 이숙종) 연속강좌 ‘역사 속의 젊은 그들’(총 8회, 매주 월·수 오후 6시)이 대학생과 일반인들의 열띤 수강 열기 속에 이어지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조선일보 후원으로 지난 10일과 15일 서울 여의도 유진투자증권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좌 주제는 19세기 후반 ‘개화(開化)’를 고민했던 대표적 인물인 박규수와 유길준이었다. 하 교수가 직접 정리한 강좌 요지를 소개한다.
1870년대 중반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던 박규수의 사랑방은 20대 전후의 '젊은 그들'로 붐볐다. 10년 후 갑신정변의 '4인방'이 되는 김옥균·홍영식·서광범·박영효의 모습도 보였고 20년 후 갑오개혁의 핵심인물인 유길준도 있었다. 고종의 측근으로서 우의정까지 지낸 환재 박규수(朴珪壽·1807~1877)가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젊은 그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박규수는 혼탁한 세도정치 속에서 40세가 넘어 뒤늦게 정치무대에 섰다. 북학파의 대부 박지원의 손자인 그는 전통적인 천하질서와 전혀 다른 신(新)국제질서를 맞이해서 고민했다. 더 이상 서양세력을 사람이 아닌 금수(禽獸)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소(小)중화를 자부하는 조선이 서양을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박규수는 돌파구를 아편전쟁 후 같은 고민을 하는 청나라 웨이위안(魏源)의 '해방론(海防論)'에서 찾았다. 서양 국가와 일본이 수호조약을 맺자고 하면 조약을 맺고 무력으로 공격해 오면 힘의 우위에 따라 방어적으로 싸우면서 서양의 장기들을 배워서 힘을 길러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세력을 현실적 주인공으로 인정했지만 주연의 자리는 양보하지 않는 논리였다. 그는 이 원칙에 따라 평안감사로서 공격적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방어적으로 처리했고, 국내정치의 갈등 속에서 난관에 빠진 한일수호조규를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박규수는 초조했다. 신국제질서의 파고는 역사의 지각생인 조선의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방에서 '19세기 386'들에게 박지원의 《연암집》과 청의 '해방론'을 가르쳤다. 그러나 닥쳐오는 파도는 훨씬 빨랐다. 부국강병과 세력균형을 모르는 주인공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서양세력을 주연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박규수의 사랑방도 거대한 파도 앞의 난관에 부딪혔다. 박규수가 세상을 떠난 후 '젊은 그들'은 새로운 문명표준을 배우러 해외의 사랑방을 찾아 나서야 했다.
유길준의 3중 어려움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열여덟이던 1873년에 박규수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규수는 변화하는 세계를 제대로 헤쳐나가려면 서양을 알기 위해 웨이위안(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공부하라고 격려했다. 유길준은 과거(科擧)를 포기하고 새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과 미국 유학 3년을 거치면서 유길준은 해방론(海防論)과 만국공법론(萬國公法論)을 넘어서서 서양을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여 한국 최초의 근대문명론인 《서유견문》을 집필한다.
서유견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의 3부작 내용을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유길준의 조선문명론은 후쿠자와의 문명론보다 3중으로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전통 천하질서의 변방에 있던 일본과 달리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이 금수로 여기던 서양을 새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전통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본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었다. 유길준은 조심스럽게 한국형 문명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단순한 국제화도, 자주화도 아니었다. 19세기형 한국적 국제화의 고민이 배어 있었다.
1880년대 한국은 전통적 특수관계의 유지를 강요하는 중국과 근대적 국제관계를 요구하는 일본 및 구미(歐美)열강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유길준은 19세기 조선의 복합 외교전략인 '양절체제론'(兩截體制論)을 제시한다. 중국과 전통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일본 및 서양 국가들과도 평등한 근대 국제관계를 확대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복합 그물망 외교의 출발이었다.
유길준은 전통적인 군주제로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험한 파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갑신정변의 실패 후 서양 민주제의 도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해답을 군민공치(君民共治)에서 찾았다. 민주화의 조심스러운 출발이었다.
그러나 유길준의 3중 복합의 꿈은 전통과 근대의 갈등, 국제 세력균형의 활용 실패, 국내 정치역량의 미흡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한국은 국망(國亡)의 아픈 역사를 맞이하면서 국흥(國興)의 미래를 새롭게 준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