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중앙시평] 국가 기능 강화하는 개헌 돼야

  • 2009-07-20
  • 조윤제 (중앙일보)

민주화 이후 지난 20여 년간 우리나라의 국가권력은 분산, 약화돼 왔다. 대통령과 행정부에 집중돼 있던 권력이 국회·법원·검찰 등으로 분산돼 왔고, ‘공적 권력’의 행사가 투명해지면서 전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약화됐다.

 

반면 우리나라의 ‘사적 권력’(이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은 오히려 집중, 강화돼 왔다. 시장에서 4대 재벌의 비중은 더욱 커졌고, 노조도 기업노조로부터 산별노조, 전국노조로 힘이 집중돼 왔다. 시민단체의 영향력도 확대됐다. 큰 그림으로 보아 국가로부터 시장으로 권력이동이 이루어졌고, 시장에서의 권력은 집중됐다. 얼마 전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이 공동 실시한 조사(중앙일보 7월 1일자)에도 이는 잘 나타나 있다. 국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파워 조직 10곳 중에 4곳을, 그것도 1~3위로, 재벌을 꼽고 있다. 그 뒤에 검찰·법원·청와대가 따라가고 있다. 가장 신뢰도 있는 파워 조직 1~4위도 역시 재벌이었다.

 

국가권력의 분산은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그것 자체를 꼭 민주주의의 심화라고 볼 수는 없으나 권력의 상호 견제를 통해 행정권력의 독주에 의한 시민의 재산권이나 인권침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상호 견제가 지나치다 보면 국정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길을 잃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세계경제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이는 국가사회에 필요한 개혁과 변화를 적시에 이루어낼 수 없게 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더구나 이것이 집중화된 시장권력과 맞물리게 되면 국가정책이 시장권력, 혹은 사적 권력의 이익 추구에 자주 압도되는 ‘정치적 포획(political capture)’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정치와 국가정책은 시장권력에 의해 포획되기 쉽다. 정치는 막대한 선거비용과 후원금을 필요로 하고 공직자 역시 후원을 가장한 금전적 유혹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국가정책은 특정이익 집단의 이익을 확대하거나 지위를 공고히 해주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장기적으로 일반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시장의 건전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정책은 파묻히기 쉽다.

 

미국 MIT의 사이먼 존슨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미국의 금융위기가 바로 이런 정치적 포획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이 미국의 선거 과정에서 막대한 후원금을 지원하여 의회와 백악관에 영향력의 그물을 형성하고, 나아가서 금융정책을 주도하는 주요 요직까지 월스트리트 출신 인사들이 차지하면서 금융계에 유리한 규제완화 정책을 이끌어 옴으로써 결국 위기를 맞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오바마 정부에서 다시 1990년대 이후 이런 정책을 주도했던 루빈 사단의 인사들이 기용됨으로써 결국 이번 위기극복 과정에서도 장래 일반 국민의 조세 부담으로 월스트리트의 투자 실패를 보상해주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1997년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게 된 것도 이런 정치적 포획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재벌의 과도한 투자확대를 막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이전의 정책 시도들이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각각 재계와 노동계의 반대에 의해 거의 모두 무산됐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하에서 기업과 금융부문의 구조적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노동개혁은 아직도 부진하다. 외환위기가 극복되고 난 이후 지난 10년간 우리 경제의 과제들에 대한 정책방향이 다시 어떻게 진행돼 오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제헌절을 맞아 국회를 중심으로 개헌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도 지금 우리나라의 국가지배구조, 권력구조는 개편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지금과 같은 권력구조로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경제 환경 하에서 그동안 우리가 이룩해온 성과도 제대로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방향은 국가권력을 더욱 분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으로 집중시켜 정부의 정책추진 기능의 효율화를 기하고 반면 책임성이 강화되는 쪽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가정책은 시장권력이 지금보다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시장의 기능을 축소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기능은 더욱 존중되고 확대돼야 한다. 그러나 시장 지배력의 집중과 확대는 견제돼야 장기적으로 시장의 건전성과 활력이 유지되고 국리민복을 위한 국가정책의 자율성이 확보될 수 있다.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