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보선 이후 정부-한나라당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퀴즈 한 가지.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는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에는 없는 점은? 쉬운 답은 정치개혁. 조금 어려운 답은 전환의 리더십(transforming leadership)이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는 출범하면서부터 대대적인 정치개혁을 내세웠다.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 해체를 비롯해 군부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전방위 사정을 통한 반(反)부패 캠페인을 벌이면서 임기 초반 지지도가 무려 90%에 이르렀다. 경제위기 속에서 출발한 김대중 정부 역시 앞선 김영삼 정부보다는 미온적이었지만 지구당 폐지, 선거구제 변화를 포함한 정치개혁을 나름대로 추진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어록에서 ‘정치+개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한나라당의 내부 갈등은 방치됐고 정당 개혁은 총선과 재·보선을 거치면서 눈에 띄게 후퇴한 바 있다. 하지만 정치개혁이라는 수사(修辭)의 정치보다도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두드러진 공통점은 전환의 리더십이었다. 임기 초반을 지나 지지자와의 허니문이 끝나갈 무렵 두 전임 대통령은 회심의 전환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김영삼 정부는 이른바 시드니 구상을 거쳐 세계화 프로젝트를 들고 나왔다. 전환의 시대를 헤쳐 갈 한국의 전략은 개방과 자율을 통한 세계화임을 천명하고 경제 문화 사회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세계화 전략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정부를 떠받치는 관료뿐만 아니라 지식인, 언론에도 세계화는 공통의 화두였고 변화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YS의 세계화, DJ의 햇볕정책
김대중 정부 역시 임기 초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급한 불길을 끄고 나서 자신의 역사적 프로젝트인 햇볕정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분단 이후 처음 남북 정상이 만나고 협력의 조치를 추진하면서 대북정책은 커다란 물줄기를 형성했다. 한편으로는 햇볕정책을 둘러싼 격한 대립이 심화됐지만 동시에 보수든 진보든 남북관계의 위상과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남북 문제가 정치담론과 의식의 한 축으로 떠오르는 계기를 닦은 점은 분명하다.
YS의 세계화나 DJ의 햇볕정책은 단순히 정치적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책략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의 세계화나 2000년 전후의 햇볕정책은 모두 변화하는 바깥 세계에 대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대응의 성격을 담았다. 적잖은 대가를 치렀지만 세계화와 햇볕정책은 우리의 관점과 태도와 행동에 깊은 전환을 가져왔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변화했다. 출범 1년 반이 되어 가는 이명박 정부에 지금 필요한 것은 전환의 리더십 모드로 바꾸는 일이다. 작년에 시작된 미국발(發) 경제위기의 급한 불길이 어느 정도 잡혀간다고 보기 때문은 아니다. 또 재·보선 이후 휘청거리는 여권에 대한 우려 섞인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는 책략이 필요해서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경제 소방수’를 넘어 큰 그림의 프로젝트로 전환해야 하는 까닭은 이명박 정부가 처한 시간적 위치 때문이다. 우연찮게도 이명박 정부의 임기는 세 개의 거대한 전환점과 겹쳐 있다. 하나는 지난 30년간 팽창해 온 미국 주도의 세계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의 시대가 저무는 시점에 와 있다는 점이다(작년 가을부터 미국 스스로가 워싱턴 컨센서스 모델을 포기한 증거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둘째, 지난 60여 년간 지속된 미국 중심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미국이 다른 세력과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미국 이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지구촌 운전대는 지난 60년간 미국-소련의 G2에서, G7으로, 그리고 다시 G20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셋째, 최근 경제 격변의 와중에서 주요 국가는 그간의 시장경제 및 정부 역할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와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는 단계로 들어섰다(약 80년 전 케인스 혁명을 통해 20세기적 대안이 등장했듯이 21세기의 대안도 서서히 떠오르겠지만).
포스트 美시대 능동 대처를
원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중대한 역사적 길목에서 우연찮게 전환의 리더십으로 변신한 사례는 역사상 풍부하다. 대공황 이후 미국의 변화를 이끌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갑작스레 타계하고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은 해리 트루먼은 6·25전쟁 참전, 일본의 전후 재건, 유럽의 경제부흥을 이끌며 미국이 지구촌 리더로 등장하는 거대한 전환을 주도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정부와 유권자의 계약은 경제 살리기였다. 하지만 시간과 우연의 수레바퀴는 정부에 새롭고 무거운 과제를 얹어 놓았다. 지난 30년, 60년, 80년간 익숙했던 모델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길목에 우리는 서 있다. 부지런한 ‘경제 소방수’로 기억될지, 역사적 과제에 맞선 ‘전환의 리더’가 될지는 이명박 정부의 선택에 달려 있다. 747이 아니라 30-60-80의 관점에서 보면 한나라당 내부 문제나 정치개혁쯤에 대한 답은 쉽게 보일 것이다.
장훈 중앙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