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386의 등장 북한의 인식변화 등으로
한민족 민족주의서 대한민국 민족주의로 전환
지난 6월 말 우리나라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보도된 바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조사 대상 학생 10명 가운데 4명은 언제 6·25가 발발했는지 정확한 연도를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남·북한 통일에 대해 필요성을 그다지 절감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 결과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젊은 세대의 인식이 그동안 우리 사회의 이념적 갈등의 한 축이었던 민족주의적 시각의 변화를 시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민족주의의 특성을 단순화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정치적으로 본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된 민족주의적 대응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민족의 문화적, 혈연적, 역사적 특성을 강조한다. 최근 일본 식민지 시대의 특성을 두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일본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는 대체로 보수·진보의 구분 없이 수용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큰 쟁점으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독도 영유권이나 야스쿠니 신사 문제처럼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양국 간 갈등 역시 내부적으로 큰 이견 없이 일본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재생산하게 했다.
또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는 남북한의 분단과 한국전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은 대체로 진보적 시각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 간략히 정리하면, 민족국가 건설은 남북한의 통일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인데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분단이 고착화되었고 그로 인해 민족국가의 건설이 지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미국에 대해서는 저항적 민족주의가 형성되었고, 미국이라는 외세를 배격한 남북한 간의 자주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의 단정(單政)과 냉전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한 것을 옹호하는 보수적 시각은 이러한 진보 진영의 민족주의에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 이념적 적대감으로 인해 이들에게 북한은 통합의 대상이기 이전에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커다란 시각의 차이로 인해 북한을 둘러싼 민족주의적 논쟁은 항상 우리 사회에 커다란 이념적 갈등을 불러왔다.
그런데 일본이든 미국이든 우리 민족주의의 기저에는 뿌리 깊은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깔려 있었다. 우리 민족주의가 저항적 속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당한 세월이 흘렀고 우리 사회의 성장·발전과 함께 민족주의적 시각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지금 중·고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20대의 젊은 세대들은 윗세대들과는 대단히 상이한 환경에서 성장해 왔다. 이들은 산업화의 수혜자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된 사회에서 자유를 누리며 컸고, 이념적으로는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고통 받은 기억을 갖지 않은 세대이다. 오히려 이들은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높아진 위상을 보며 성장해 왔다. 세계 곳곳에서 만나는 우리 제품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박찬호, 박세리, 김연아, 박지성, 박태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 스포츠 스타들의 활약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 만큼 기성세대와는 달리 질곡의 역사로 인한 피해의식이나 열등감도 없다. 일본인들이 ‘겨울연가’ 등 한류에 열광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제이 팝(J-pop)이나 일본 만화 등 일본 문화를 즐기는 데 대한 거부감도 없다.
미국에 대한 태도에도 기성세대에서는 한 쪽에서는 무조건적인 거부와 저항, 또 다른 쪽에서는 맹목적 추종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이 존재하지만,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상반된 극단적 반응을 불러 온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막강한 국력에 대한 동경심도 크지 않다.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미국은 우리가 여전히 배워야 할 선진국이면서도 동시에 경쟁국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한·미 간에 이해관계가 부딪힐 때는 분노하고 우리 이익이 관철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미국은 더 이상 구세주도 아니고 제국주의적 악도 아니다. 북한에 대한 태도 역시 변화가 생겨났다. 이들은 북한에 대해 동포애를 갖고 있고 궁극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데도 공감한다. 이 때문에 북한이 기아나 수재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고 타의에 의해 분단되었기 때문에 무조건 통일해야 한다는 통일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이들 세대는 통일 이후에 지불해야 할 비용과 사회적 결과에 대해서도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주의에 대한 이들의 시각은 이념적이라기보다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격렬한 논쟁과 갈등을 이끌었던 민족주의는 이제 변화하고 있다. 기성세대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피해의식과 열등감의 소산이었다면 젊은 세대는 역사로 인한 굴절과 구김을 경험하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실용적 태도, 미국·일본에 대한 당당함이 그 변화된 특성이다. 특히 분단의 장기화와 한국 사회에 대한 자긍심의 증대와 함께 북한과의 상이한 정체성도 커지고 있다. 마치 같은 독일어권이고 게르만족이라고 해도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서로 다른 나라이듯이, 북한을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남한만의 새로운 민족의식과 정치적 정체성이 강화되어 가고 있다.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강원택 EAI 시민정치패널 위원장 · 숭실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