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미국이 강한 건, 세계인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

  • 2008-12-28
  • 김환영 (중앙일보)

[김환영 기자의 글로벌 인터뷰] 미국이 강한 건, 세계인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

 

피터 카젠스타인 미국 정치학회장

 

같은 학문 분과에서도 전공 분야가 아니면 최근 동향을 좀처럼 알 수 없다. 석학들은 좀 다르다. 그들은 분야를 넘나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분야를 정립하고 나서는 학문적 미개척지를 향해 떠난다. 피터 카젠스타인(63) 코넬대 석좌교수가 바로 그런 범주에 속한다. 2008~2009년 미 정치학회(APSA) 회장인 카젠스타인 교수는 국제정치경제론·비교정치론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다. 그의 학문적 역정은 독일정치론·일본정치론·안보·지역통합·반미주의·문명의 국제정치학 등 정치학의 모든 영역에 흔적을 남겼다.

카젠스타인 교수는 학문적인 포용성과 다양성이 걸출한 학자다. 그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소련·동구권 붕괴 이후 정치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약화된 것이 학문적으로 큰 손실이며 정치학 담론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형태로든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인 그는 스워스모어 칼리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카젠스타인 교수는 특히 정치학에서 주요 분야 중 하나인 국제정치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현재도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정치경제학자다. 카젠스타인 교수는 한국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한국의 경제성장은 역경 극복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10월 중앙일보에 기고하기도 했다.

최근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주최한 학술행사 참석을 위해 방한한 그를 만나 향후 세계 질서와 오바마 시대의 미국에 대해 질문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다. 그 힘의 원천은?
“상상력이다. 미국은 세계인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메리카 대륙은 발견 당시부터 유럽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세계인이 자국 사회에 존재하는 희망과 두려움을 미국에 투사하며 미래를 꿈꾼다.”

-버락 오바마가 그런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정치 지도자로서 오바마가 지닌 카리스마의 정체 또한 상상력의 자극이다. 오바마는 지지자들이 개인적인 희망과 공포를 자신에게 투사시키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에게 열광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 또한 그가 제시하는 상상력의 세계에 초대받고 이에 응한 사람들이다.”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세계의 반미주의는 수그러들 것인가.
“미국의 대외정책은 덜 일방주의적이 될 것이다. 반미주의의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의 정책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반미주의는 약화될 수 있다. 그러나 반미주의의 또 다른 원천은 미국의 ‘위선’이다. 국제 정치의 현실은 미국 대통령을 위선자로 만든다. 각 지역 동맹국의 이해를 오바마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반미주의의 강도는 약화되겠지만 상당한 연속성이 예상된다.”

-경제위기의 여파로 미 행정부가 보다 강력한 산업정책을 펴게 될 것인가.
“1960년대와 70년대에 한국·일본이 펼쳤던 유형의 정부 주도적 산업정책을 미 행정부가 채택할 가능성은 없다. 정부가 산업정책을 펴기 위해 필요한 관료 엘리트가 미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바마 행정부가 구사할 수단은 주로 세제 혜택과 보조금 지원이 될 것이다. 미국이 전통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거시경제 정책을 대체할 산업정책의 등장은 예상되지 않는다.”

-경제민족주의가 미국에서도 등장할 것인가.
“일본이 급부상하던 80년대에 미국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국산품 애용운동(Buy American movement)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소비자들은 브랜드의 국적보다 가격에 민감하다. 전 세계적으로 제품의 국적은 이제 의미가 없다. 경제민족주의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경제민족주의가 강력한 한국은 예외적인 경우다. 경제민족주의가 미국에 대두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민족주의를 넘어 국제 지역별로 지역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이러한 조류에 뒤처지고 있는가.
“국제 지역주의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는 없다. 지역마다 각자의 기준으로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럽 지역은 정치 통합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서나가고 있다. 동아시아는 정치 통합은 미약하지만 시장 통합이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각 지역은 지역 내 정치 현실에 맞춰 통합이 추진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지역 통합에서 앞서고 있다고 보는 것은 유럽 중심적인 시각이다.”

-미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간 협력체인 ‘민주주의 연맹(League of Democracies)’ 창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가 당선됐으면 동아시아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는데.
“‘민주주의 연맹’ 구상은 중국을 노골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미국 내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과 일본 우파의 합작품이었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는 강자 편에 서는 편승외교(bandwagoning)가 강자를 견제하는 균형외교(balancing) 전통보다 강했다. 편승외교는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했다. 균형외교 전통이 강한 유럽의 역사는 유혈의 역사였다. 동아시아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중국의 국력이 팽창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당분간 통합 추세가 계속될 것이다. 통합의 정도와 속도는 중국의 안정에 달려 있다. 20~30년 정도 뒤에는 중국 인구의 노령화가 큰 문제로 부상할 것이다. 이때 중국의 눈은 내부로 향하게 된다. 중국이 오늘의 일본처럼 되는 것이다. 일본의 노령화가 야기할 문제는 학자들은 알고 있었으나 언론매체에서 공론화하지 않았다. 동북아시아는 당분간 통합을 도모하는 가운데 환경위기 해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간의 통합도 계속될 것이다.”

-국제지역의 부상으로 민족국가는 쇠퇴하는가.
“국제지역이 중요하게 됐다고 해서 민족국가의 중요성이 감소하지 않는다. 국제체제에서 국제지역과 민족국가는 서로의 발전을 지원하며 질서를 형성하는 상호구성적(co-constitutive)인 관계다.”

-지역 통합이나 국제 지역주의의 종착점은 민족국가를 넘어선 ‘인종국가’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승전으로 끝나 인종주의의 생명력은 소멸했다. 미국은 전후 세계에 대한 헤게모니를 쥐게 되자 대내외적인 인종주의·인종차별을 철폐할 필요성을 체감했다. 그래서 트루먼 행정부는 인종차별을 우선 군부에서 철폐했다. 당시 미 군부는 인종 관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었다. 20여 년 뒤 민권운동이 발생했으며 다시 20여 년 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EU는 코카서스 인종, 최근 창설된 남미국가연합(Unasur)은 히스패닉 인종이 중심이 되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중남미에서는 인디오들이 도처에서 집권 세력으로 등장했다. 유럽을 규정하는 것은 인종이 아니라 문화다. 영국·프랑스·독일 간의 역사적인 갈등도 문화적 측면이 강하다. 현재 유럽에서 갈등은 인종이 아니라 종교적·문명적 정체성을 두고 전개되고 있다.”

-이번 경제위기는 학문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경제학이나 국제정치경제학 등의 분야에서 대대적인 이론 수정이 필요할까.
“아직 모른다. 요즘 재정경제학자들은 멍청한(silly) 사람들처럼 보인다. 전 세계 MBA 과정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 온 포트폴리오 이론(대규모 자금의 유리한 분산 투자를 위해 수리적으로 체계화한 증권 투자 이론)도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났다. 하지만 최소한 1~2년이 지나야 현 위기의 학문적 함의가 명확해질 것이다.”

 

김환영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