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환경운동연합 간부의 공금 횡령 사건이 시민운동 진영에 ‘결정타’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운동가가 국민 세금으로 만들어진 정부 지원금을 개인 용도로 썼다는 의혹은 그 자체로 ‘정치권력과 유착한 시민단체’라는 보수 세력의 주장에 부합한다. 요즘 시민운동가들이 모이는 술자리의 단골 화제도 환경련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환경련에 대한 질타다. 90년대 초반부터 활동해온 한 시민운동가는 “99년 경실련 간부의 칼럼 대필 사건이 도마 위에 올랐을 때는 ‘거짓말’이 문제가 됐지만, 지금 환경련은 ‘도둑질’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따지고 있다. 그런데도 환경련 활동가들의 사태 인식이 너무 안이하다”고 말했다. 그는 “환경련 활동가들이 조직의 위세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편파 또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비난보다 시민운동가들이 더 뼈아프게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민주주의 문제다. 시민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내부의 민주주의도 강화하지 못한 결과, 보수 세력의 이념 공세 등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에는 총선시민연대를 매개 삼아 시민들이 정치개혁을 요구했죠. 그런데 2002년 대선에서는 시민들이 ‘대선유권자연대’에 모여들지 않더라고요. 시민단체들이 만든 그런 연대조직이 있었던 것도 잘 기억하지 못할걸요. 당시 사람들은 ‘노사모’로 몰려갔어요. 불과 2년 만에 일어난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막막했죠. ‘도대체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뭔가’ 싶었어요.”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의 회고다.
올 봄과 여름에 걸친 촛불 정국은 그 흐름을 재확인한 계기가 됐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무관심한 개인이라고 치부했던 평범한 시민들이 촛불 항쟁을 주도했는데, 시민단체들은 이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한때 강력한 후원자였던 그들에게 더 이상 감동과 신뢰를 주지 못하고 관성에 젖어 있다”는 게 안 팀장의 생각이다.
관성의 저변에는 시민단체의 내부 민주주의 문제가 있다. 김준기 서울대 교수는 지난 2006년 전국 76개 시민단체의 내부 의사결정 과정을 조사·연구했다. 그 결과, 이들 단체가 의사결정기구(운영위원회 등)를 소집하는 빈도가 1년에 여섯 차례 이하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정부투자기관의 이사회 개최 빈도보다 낮은 수준이다. 그는 사무처의 몇몇 간부 중심으로 단체의 중요 현안이 결정된다는 사실도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내부 민주주의가 진전되지 못하면, 조직 전체의 활력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시민단체들의 대표적 활동 형태인 ‘입법청원 운동’의 경우, 참여정부 출범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 2001년 130건에 이르렀던 제정·개정·폐지 입법 청원은 2005년 28건으로 뚝 떨어졌다. 홍일표 희망제작소 연구기획위원은 “특히 의원들의 법안 발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 비해 (시민단체들의) 입법 청원은 급격히 줄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는 물론 민주당·민주노동당 등이 정당 본연의 기능을 강화한 긍정적 측면이 작용했다. 그러나 민의를 대변해 구체적 대안을 내놓는 제도 개혁 분야에서 시민단체의 ‘새로운 콘텐츠’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반이명박’에 머물러선 안 돼촛불 정국 이후 여러 고심 끝에 시민단체들이 내놓은 카드는 ‘민생민주국민회의’다. 지난 10월26일 출범했다. 지난 12월4일에는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과 함께 ‘경제·민생위기 극복을 위한 제 정당·시민사회단체·각계인사 연석회의’를 결성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지난 대선과 촛불을 통해 정치권력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됐다”며 연석회의 결성의 배경을 설명했다. 정책을 중심으로 시민단체와 민주정당이 연대해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겠다는 뜻이다. 민생민주국민회의가 추구하는 것이 일종의 ‘반이명박 전선체’가 아니냐는 지적도 여기서 비롯했다.
그러나 정권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방식으로 시민단체의 지도적 위치를 되찾을 수 있을지에는 의문이 적지 않다.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시민운동이 ‘반이명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촛불을 통해 새로운 흐름을 확인했는데,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시민단체들이 그런 변화에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대엽 고려대 교수는 시민운동 전체가 ‘새로운 주기’에 들어섰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들의 조직 역량은 강화됐지만 시민들과의 직접 소통은 약해졌다고 그는 분석한다. 지금까지 ‘저항의 권위’를 얻었다면, 앞으로는 ‘소통의 권위’를 얻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조 교수는 특히 촛불 정국에서 등장한 시민들에 주목했다. 2002년 이후 사회변동을 이끈 것은 시민단체가 아니라 “온·오프라인에 구애받지 않고 소통하고 결집하며 흩어지는 유연한 ‘전자적 대중’”이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2008년 현재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사활의 기로에 서 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뒤이은 실정은 다시 한번 ‘민주주의 투쟁’을 요구한다. 동시에 촛불 시민의 등장은 구태의연한 반정부 투쟁 방식의 퇴출을 요구하고 있다. “90년대 민중운동 진영은 시민운동이 왜 등장했는지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프티부르주아’ 운동이라고 비판만 했지요. 그런 자세 때문에 민중운동이 침체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시민운동가들이 지금 촛불 시민들이 왜 탄생했는지 고민하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에요. 다만 시민단체들이 촛불로 대표되는 새 흐름에 어떻게 합류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죠.” 하승창 운영위원장의 말이다. 시민단체들의 앞길을 밝혀줄 유일한 등대는 결국 촛불 시민이다.
참고 자료 <한국 시민단체의 내부 의사결정 과정에 관한 연구> 김준기, 서울대출판부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김호기, 아르케 〈NGO와 정부 그리고 정책〉 박상필, 한울 <시민단체, 희망인가 덫인가> 이달원·정승윤, 시대정신 <한국 시민운동의 구조와 동학> 조대엽·김철규, 집문당 <한국의 사회운동과 NGO> 조대엽, 아르케 <아래로부터의 시민사회> 주성수 등, 창비 <하승창의 NGO 이야기> 하승창, 역사넷 <기로에 선 시민입법> 홍일표, 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