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출간
한국 정치의 위기를 논하는 얘기가 학계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다. "거리의 정치"로 국회가 정치의 주변부로 밀리는가 하면 정당이 다양한 계층의 요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등 대의제의 위기론이 확산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현실이 난마처럼 얽혀있고, 해답은 떠오르지 않을 때 결국 기댈 수 있는 건 옛 사람들의 지혜다. 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강원택 교수는 "보수"(保守)라는 해묵은 개념에서 그 해법의 실마리를 찾는다. 현대 민주주의의 본산지 중 한곳인 영국 보수당이 그가 구한 답안지다.
거대 지주와 귀족의 정당이었던 보수당은 200년 넘는 세월을 꿋꿋이 버텨오고 있다. 그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제3정당의 지위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자유당이 20세기 초 노동당의 출현으로 몰락한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다.
저자는 구질서를 대표하고 그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보수당이 그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보수당은 탄생 초기부터 국왕과 세습귀족, 국교회인 성공회, 대지주의 이익 등을 기본 가치로 여겼다. 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등장했던 20세기에도 보수당은 맹위를 떨쳤다. 보수당은 20세기의 3분의 2를 집권했고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20세기를 "보수당의 세기"(Conservative century)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영국 보수당의 이 같은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일단 모든 정당이 그렇듯 보수당도 권력을 열망하는 정당이지만 매우 현실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급격한 변화를 막아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최대한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
이에 따라 수구적 태도보다 변화하는 현실에 자신을 맞추려 했다. 다시 말해 이념적 원칙이나 순수성보다 권력 장악이라는 실용성을 강조했다는 얘기다.
비슷한 맥락에서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유연함도 한몫 했다. 현상유지(status quo)를 원하는 정당답게 보수당은 정책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있어 자유당이나 노동당에 비해 한 수 떨어졌지만 시대의 변화를 잘 읽었다.
필요하면 자유당이나 노동당이 추진한 정책을 과감히 계승했다. 곡물법 폐지, 아일랜드 독립 허용, 상원의 권한 약화를 뼈대로 한 의회법 개정, 여성 참정권의 허용, 식민지 독립 등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지만 일단 정책이 결정되고 나면 집권 후에도 이를 되돌리려 하지 않았다.
또 보수당은 꾸준히 당의 외연을 넓혀왔다. 귀족집단으로 출발한 보수당은 산업혁명 후 큰 부를 축적한 상공업자를 영입했다. 노동계급에까지 투표권이 확대된 이후 당 조직의 강화를 위해 노동계급을 보수당의 지지자들(Working Class Tory)로 만들었다.
단순히 개방만 한 것이 아니었다. 비주류 유대계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 상공업자 출신의 얼 볼드윈, 중산계급에 속했던 마거릿 대처는 모두 총리의 반열까지 올랐다. 여기에 과거 보수당과 대척점에 섰던 이들을 영입해 당의 중책을 맡기기도 했다.
이처럼 보수당은 이익을 있는 그대로 지키기보다 양보할 것은 양보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뿌리 채 위협받지 않도록 했다. 영국 보수당이 200년을 버텨오며 국민 지지를 잃지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보수당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디즈레일리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빌어먹을 너의 원칙을 버려라. 그저 당에 충실해라."(Damn your principles, Stick to your party)
동아시아연구원. 364쪽. 1만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