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경향신문·메릴랜드大·EAI국재여론조사 (4)민주주의 위기
한국인이 한국 정부를 신뢰하는 비율이 18%로 세계 19개국 중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서구 민주국가보다 비(非)서구 민주국가에서 정부 신뢰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인권선언 60주년을 기념해 경향신문이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국제여론조사기관인 세계여론네트워크(WPON) 및 한국 동아시아연구원(EAI)과 공동으로 실시한 ‘민주주의 위기’ 여론조사 결과다. 13일 전 세계에 공개된 이 조사는 러시아·영국·우크라이나·폴란드·프랑스, 중국·인도·인도네시아·한국, 미국·멕시코·아르헨티나, 아제르바이잔·요르단·이란·터키·팔레스타인, 나이지리아·이집트 등 5대륙 19개국 1만9525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젊은층의 정부 불신이 심각했다. 20대의 8.5%, 30대의 4.5%만이 정부를 신뢰한다고 응답했다. 50대 이상 28.4%와 큰 차이다. 정한울 EAI 여론분석센터 부소장은 “정부 불신 규모가 10명 중 8명인 것도 문제지만 응답자 구성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정치 불신이 만성화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소득·학력계층간 정부 신뢰의 격차는 더 심각하다. 월소득 100만원 미만의 최저 소득계층과 중졸 이하의 저학력 층에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은 반면 중산층 이상의 소득계층과 대학 재학 이상의 고학력 층에서는 10%대 초반의 극심한 정부 불신을 보였다. 이는 정부에 대한 인식차이가 곧바로 계급적, 계층적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우려되고 있다. 또한 여론을 주도하는 고학력, 고소득층에서 정치적 불신이 크다는 것은 정치적 냉소가 더욱 폭넓게 확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 부소장은 “정부 불신의 주요인이 정부가 특정세력만을 대변한다는 불신과 민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선, 그리고 경제적 실적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면서 “새 정부의 친기업 정책이 다른 계층에 대한 배제로 이해될 수 있는 만큼 정부가 신뢰기반을 구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역설
세계적으로 정치 불신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응답자 중 44%만이 자국 정부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54%는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특히 중국처럼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거나 주요 이슬람국가, 정치적 자유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동구권 국가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중국 응답자의 83%, 러시아 국민의 64%가 정부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반면 전통적인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부에 냉담했다. 미국·프랑스·영국에서 자국 정부를 신뢰한다는 응답이 각각 40%, 37%, 31%로 전체 평균을 밑돌았다. 또한 한국이나 남미의 국가들처럼 1970~80년대에 민주적 전환기를 겪은 국민들의 정부 불신이 특히 심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 멕시코 국민 중 정부에 신뢰를 보인 응답은 각각 23%, 22%였고 한국은 조사국 중 가장 적은 18%에 불과했다. 정부권위의 정통성이 민의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에는 세계인의 85%가 동의했다. 중국인 가운데 83%는 보통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고 답했다.
불신의 요인
첫째 대표성의 위기다. 정부가 소수 거대 이익집단만을 대변한다는 응답자가 63%나 됐다. 전체국민을 대변한다는 응답은 30%에 그쳤다. 특히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은 멕시코(83%), 미국(80%), 한국(78%) 등에서 이 같은 불신이 높게 나타났다. 민주제도가 다양한 계층의 이익을 조화롭게 실현하는 데 기반을 둔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국가에서는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정책집행 비용이 크게 늘어나고 정부 통치기능이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둘째, 반응성의 위기다. 국정이 민의를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하는가를 10점 만점으로 물어본 결과 전 세계 응답자 평균은 8점으로 기대치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현재 정부 성적은 전 세계 평균 4.5점에 그쳤다. 국민 여론을 간과하거나 무시한다고 보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셋째, 효율성의 위기다. 경제실적 부진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의 효율성에 대한 불신이 높을수록 정부에 대한 불신도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중국(10.7%)이나 페루(7.7%), 러시아(6.7%), 이집트(6.8%), 요르단(5.7%)처럼 경제성장률이 높은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정부 신뢰도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객관적 경제지표는 나쁘지 않지만 주관적 경제체감도를 감안한다면 정부가 불신받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