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NK 논평] ‘북중관계 이상(異常)설’에 대한 통시적 접근: 북중러 지정학의 시각에서](/data/bbs/kor_issuebriefing/20250521145828578253185.jpg)
[Global NK 논평] ‘북중관계 이상(異常)설’에 대한 통시적 접근: 북중러 지정학의 시각에서
논평·이슈브리핑 | 2025-05-21
전재우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
전재우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관측되는 북중 간 거리감은 단선적인 ‘균열’이 아닌 북한의 장기적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분석합니다. 전 위원은 냉전기 이래 반복되어 온 북중러 삼각관계의 재편 양상을 근거로, 북한은 특정 국가에 종속되기보다는 강대국 간 전략적 균열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자율성과 체제 생존을 도모해 왔음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저자는 한국이 북중러 관계를 일시적 ‘기회’로 간주하는 접근에서 벗어나 지정학적 복합성에 기초한 외교 기조를 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I. '북중관계 이상설' 부상의 배경
2023년 7월, 북한의 전승절 행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친서를 러시아의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등 외빈이 지켜보는 공개 석상에서 수령했다. 같은 해 9월, 김 위원장은 "우리나라의 최우선순위는 러시아와의 관계"라고 언급하며, 대외관계 중심축의 이동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2024년 6월에는 '북러 조약'이 체결되었고, 중국은 이에 대해 다소 원론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올해 1월에는 노동신문 1, 2면에 푸틴의 연하장이 대대적으로 게재된 반면, 시진핑의 연하장은 3면에 배치되었다.
2024년에 들어와 중국도 상징적 외교 조치에 변화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정은–시진핑 산책(2018)' 기념 발자국 동판이 철거되었고, 인근에 조성되어 있던 김일성·김정일의 방중 기념 전시 공간도 폐쇄되었다. 같은 해 5월, 중국은 한중일 정상회의 공동성명에 '한반도의 비핵화' 문구를 포함시키는 데 동의했으며, 이에 대해 북한은 내정간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북러 조약' 체결 직후인 7월에는 왕야쥔(王亚军) 주북 중국대사가 북한의 전승절 행사에 불참하면서, 북중 간 거리감이 외교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 속에서 '북중관계 이상설'이 제기되었다. 일부 분석가들은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 안정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해석한다. 기존 소위 '중국역할론'과 2023년 11월 APEC 정상회의에서 나타난 미·중 간 갈등 관리 시도와 2024년 4~5월 사이 진행된 양국 간 군사 채널 복원 움직임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한편, 일각에서는 '북러 조약' 체결을 북중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제시한다. 러시아의 대한반도 영향력 확대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희석시키는 성격의 조약이 중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했으며, 이것이 최근 북중관계에 긴장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설명력의 포괄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사건적 층위와 구조적 층위를 뒤섞어 분석함으로써 인과관계의 논리적 정합성을 저해하는 한계를 지닌다. 예를 들어, '북중관계 이상설'이 본격적으로 관측되기 시작한 시점은 최소한 '북러 조약' 체결 약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는 북러 협력이 북중 간 갈등의 직접적 계기였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중국이 북한보다 대미 관계 관리를 우선시한다는 사실은 이미 지속적으로 관찰되어 온 현상으로, 최근 일련의 국면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한 분석 틀로 보기 어렵다.
오늘날 러-우 전쟁의 출구 전략,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전망이 중첩되는 가운데, 신호(signal)와 잡음(noise)의 구분이 대단히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변수 간 위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개별 사건에만 집중하여 비약적인 결론을 도출하거나, 구조적 요인과 단기적 사건을 동일 선상에서 다루는 접근은 분석의 타당성을 저해할 수 있다. 이에 이 글은 기존 해석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지정학적 맥락과 강대국 국제정치라는 구조적 요인을 중심으로 북중러 관계를 통시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북중관계에 대해 보다 일관된 설명의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냉전기 북중러 관계에 대한 통시적 검토
1945년 이후 10년간 북한을 경제적‧군사적으로 지원한 주요 국가는 소련이었다. 이는 소련이 한반도 북동부 지역을 세력 확장의 잠재적 교두보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역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으나, 실질적인 군사‧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소련과 중국의 지정학적 인식은 한국전쟁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1950년 10월 초,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중국의 참전을 촉구했으나, 마오쩌둥은 참전 조건으로 소련 공군의 공중 지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 충돌 가능성, 나아가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을 우려하여, 북한군 전력을 만주로 철수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Shen 2020). 이는 최악의 경우 한반도 전역을 유엔군에 내줄 수도 있다는 전략적 계산이 반영된 조치였다. 이러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소련의 항공력 제공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국군의 한반도 개입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이 사건은 한반도를 둘러싼 소련과 중국의 지정학적 이해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의 관점에서 한반도는 세력권 확대를 위한 유용한 지정학적 공간이었지만, 미국과의 핵전쟁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수해야 할 지역은 아니었다. 만약 유엔군이 북한 전역을 점령하게 되더라도, 소련의 전략적 중심이 유럽지역에 있었고, 극동 시베리아는 인구가 희박한 황무지에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에 북한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완충지대였다. 한국전쟁 종전 이후에도 중국은 북한에 대해 지속적이고 전방위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중국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북한의 인프라 재건을 지원했고(Shen and Xia 2012),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소련의 대북 지원을 상회하는 3억 2천만 달러를 북한에 제공했다(CIA 1956).
1956년부터 흐루쇼프는 일인 지도체제가 아닌 집단지도체제 운동을 주도하고 평화공존 노선을 채택했다. 이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수용할 수 없는 노선이었다. 이에 따라 1964년경에는 북소관계와 중소관계가 각각 상호 비방을 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정책 변화에 대응하여 김일성은 1956년 8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연안파와 소련파 인사들을 숙청하고 외세로부터의 자주를 강조했다. 이는 북한 내 외국군 주둔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고소련이 북한 지역을 세력팽창 목적으로 활용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에 소련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및 군사적 지원을 대폭 줄였다. 소련의 지원 축소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한 대량 아사 사태 등 내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북한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특히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중국은 북한에 약 460대의 항공기를 제공했다. 이는 중국이 내부적으로 어려웠던 만큼 완충지로서 북한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북중관계는 악화된 반면, 북소관계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북한 은 중국의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이에 중국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러한 상호 비방은 양국 간 이념적 불일치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북중관계 악화의 더 결정적인 요인은 중국의 베트남전쟁 지원에 대한 태도였다. 당시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 흑해 연안, 그리고 중국을 거쳐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중국 내부에서는 소련 군수물자의 자국 영토 통과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 마오쩌둥 중심 세력은 소련의 자국 영토 경유를 반대했으며, 덩샤오핑 중심 세력은 통과를 수용하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내부 노선 갈등은 문화대혁명 발발의 배경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Radchenko 2024). 마오쩌둥이 중국 영토를 통한 소련의 군수 지원을 꺼린 근본적 이유는, 그 자체도 민감한 사안이었지만, 무엇보다 자국 남방에 강력한 통일 베트남의 등장 가능성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김일성에게 중국이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저지할 수 있다는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중국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중소 갈등이 고조되자, 북소관계가 개선되었던 것이다. 특히, 소련은 북한이 베이징과 인접했다는 점에서, 전략적 요충지로서 북한의 역할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약 100대에 달하는 MiG-21 전투기를 제공하는 등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었다.
1969년 중소관계 악화를 인식한 닉슨은 베트남전 종식을 도모하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미중관계의 진전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관계개선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들었고, 이에 소련은 전략적 긴장 완화를 위한 미소 간 데탕트를 미국 측에 제안하였다. 미국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미중 데탕트에 뒤이어 미소 데탕트가 추진되기 시작했다. 중국과 소련에게 대미 관계의 개선은 안보 위협의 현저한 감소를 의미했으며, 이는 북한이 완충지로서 갖던 지정학적 가치를 감소시켰다. 따라서 1970년대 중후반기에 중국과 소련 모두 북한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대폭 축소했다.
베트남전쟁이 종식된 1970년대 중반 이후 중-베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 배경에는 제3세계 내 공산주의 주도권을 둘러싼 중소 경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1978년 베트남과 소련의 경제·군사 협정 체결은 중국을 결정적으로 자극하였다. 중국은 이 협정을 사실상의 군사동맹으로 간주했다. 소련과 베트남의 밀착이 심화되면서, 중국은 소련이 자국을 전략적으로 포위하려 한다고 우려했다. 이에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통해 자국의 전략적 위상을 회복하고, 베트남의 대외정책 노선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은 표면적으로 세 가지 전쟁의 명분을 내세웠다. 첫째, 베트남 정부가 자국 내 화교 및 소수민족에 대해 불공정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 둘째,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하여 중국이 지지하던 크메르 루주 정권을 축출한 점, 셋째, 베트남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던 난사군도(스프래틀리 제도) 일부를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를 계기로 인민해방군의 군사 현대화를 도모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 모든 요인들이 고려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 요인은 지정학적 피포위 위기 인식이었다. 대내적으로 중국 매체는 전쟁을 "소련의 대리세력에 맞선 자위적 역공"으로 규정하였다(Zhang 2015).
이러한 배경에서 발발한 중-베 전쟁(1979)은 중국이 인접한 약소국에 대해 무력 사용을 불사할 수 있다는 현실을 북한에 각인시켰다. 1979년 덩샤오핑이 베트남에 대한 무력 침공 의사를 김일성에게 직접 전달했을 때, 북한 지도부는 심각한 배신감을 느꼈다. 북한은 중-베 전쟁을 통해 중국이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오랜 우방국에 대해서도 무력 사용을 불사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북한이 설령 한반도를 '통일'하더라도 중국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자국이 언제든 희생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북한의 대중국 인식에 구조적인 불신을 초래하였다(신종호 외 2020).
사실 북한은 1975년 베트남 통일 직후 북베트남이 미국 및 남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다. 북한은 베트남전 당시 이념적 연대와 전투 경험의 축적이라는 전략적 목적에서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북한은 최소 1개 전투비행대대와 2개 대공포 연대를 포함한 상당한 수준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였다(RFA 2024). 1975년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났을 때, 한반도 재통일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마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Wilson Center 1975).
미소 데탕트는 1977년 소련의 미사일 정밀 타격 실험과 핵 다탄두 기술의 진척 등 핵무력의 증강과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을 계기로 종료되었다. 그리고 레이건 시기부터 미국은 소련을 압도하는 방식의 붕괴 전략을 추구했다. 소련에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재차 제고되었다. 소련은 대응 차원에서 1984년~1986년 북한에 MiG-29, MiG-23, Su-25와 같은 항공기 100대를 제공해주었다(CIA 1985). 반면, 미중관계는 안정적인 발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 완충지로서의 북한의 의미는 반감되었고 결과적으로 중국은 지속해서 북한에 유의미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레이건이 등장한 1981년 이후부터의 미소 대결로 소련의 국력이 약해지자 1987년부터 미소는 제네바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재차 데탕트를 추구했다. 이에 소련 안보 측면에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다시 감소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었다. 즉, 1980년대 후반부터는 중소 모두로부터 북한에 대해 유의미한 지원은 없었다.
냉전기 강대국 관계의 변화와 이에 따른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의 증감은 중국과 소련의 대북 지원 여부 및 그 수준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경향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만 북한에 항공기 등 (당시 기준) 첨단 무기를 제공하는 제한적인 군사 지원 양상을 보였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 어느 일방에 편승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이 오랜 우방국인 베트남을 무력 침공한 1979년은 중국에 대한 불신을 각인시켰다. (이 사건은 소련이 중국 국력 소진을 위해 베트남과의 갈등을 유도했다는 해석 가능성도 제기된다.) 대신 북한은 전략 환경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강대국 간 갈등 및 자신의 완충지로서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략적 자율성과 생존을 도모했다.
III. 냉전 종식 이후 북중러 관계의 구조적 안정성과 제약
냉전기와 오늘날 강대국 국제정치의 핵심적 차이는 미국의 주요 경쟁국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1960년대 말부터 지속된 미중관계의 발전은 중국에게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감소시켰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의 주요 경쟁국으로 부상하면서, 미국은 중국견제를 일관된 국가전략으로 설정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 관점에서 북한은 전략적 완충지로서의 중요성을 다시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북한은 중러의 요구가 아닌 자국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핵무장을 선택했다. 이는 북한이 중국의 완충지 역할을 더욱 공고히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 러시아는 오늘날 동북아에서 세력팽창을 추구하거나 미국과 본격적인 갈등을 빚을 이유나 여력이 없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중러의 대북 지원은 북한 체제의 붕괴를 방지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북한이 급격히 붕괴할 경우 동북 3성의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거나, '통일 한반도'가 미국과 전략적으로 밀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가능성은 현재의 한반도 분단 상황보다 더 큰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식된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을 완충지대로 두는 현상유지를 중시한다. 또한, 오늘날 중국의 세력 확장은 과거 소련과 달리 북한을 반드시 경유할 필요가 없다. 중국은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한국과도 일정 수준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며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적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이후 오늘날까지 북한의 생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중국의 지원이었음에도, 북중관계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요컨대, 북중관계는 구조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긴밀한 협력 관계로의 진전도 제약된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 아래, 일정한 부침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핵무기 개발 과정에서 북한이 구사한 '벼랑 끝 전술'이나 문재인 정부 시기 남북이 주도적으로 현상변경을 시도했던 사례는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북한 또는 한반도 주도의 '현상변경'의 성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시도가 발생할 경우, 중국은 대체로 북한에 대한 개입과 관여를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는 탈냉전 이후 북한 또는 남북 주도의 변화가 그 지향점은 상이하더라도, 한반도 '현상유지'를 중시하는 중국의 관점에서는 '이상(異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반도 발 현상변경 시도의 영향력과 추진 동력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된 양상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새로운 길'을 표방하며 전략 노선을 (재)전환했다. 이는 북한이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대북관계 개선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 악화를 유도함으로써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대중 견제를 강화하려는 보다 거시적인 구상에 있다고 인식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간 관계가 매우 강력한 현상유지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북한이 재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핵무력 고도화를 통해 '자주외교노선'의 강화를 재추진하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중국의 관여 정도도 감소했다. 따라서 '북중관계 이상설'은 오히려 북중관계가 본래의 구조로 회귀하는 '구조적 회귀'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냉전기와의 또 다른 차이는 현재 중러관계가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우호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냉전기처럼 중러 간 갈등이 북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낮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북러 양국 모두 중국과의 구조적 비대칭성 심화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우려에서 비롯된 북러 간 전략적 협력 공간도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더 핵심적인 변수는 러-우 전쟁 출구 전략에 대한 강대국 간 복합적이고 전략적인 계산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단순한 작전적 조력자 확보를 넘어, 북한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전략적 지렛대를 확대하고 서방의 전략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 역시 대러 협력을 단순한 경제적·군사적 반대급부 획득에 국한하지 않고, 전쟁의 향방과 종결 국면을 주시하면서 러시아와의 밀착을 전략적 지렛대로 활용하여 유리한 전략적 공간을 모색하려는 장기적 구상을 추진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한의 전략적 공간 확대 시도가 곧 북미 대화 재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노이 회담 이전까지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한 현상변경을 추구했다. 그러나 결렬 이후부터는 미국과의 적대적 공존을 대내외 안정성 확보의 동력으로 삼는 현상유지 전략으로 전환했을 개연성이 크다. 따라서 최근 제기되는 '북핵 동결과 제재 완화 교환론'이나 '남북미 삼자 관계개선론' 등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일정 수준의 논리적 비약을 동반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단기적 북미관계 진전보다는 미중관계의 근본적 변곡점, 대안적 국제질서의 부상 등 구조 변화에 대비한 초장기 전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중단기적으로 미국과의 대화에 적극 나설 전망은 제한적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양상은 중·러가 북한에 첨단 군사기술을 이전하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중러관계가 공고한 상태가 유지되는 이상 중러가 중대한 안보 위협 상황에 빠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리고 첨단 무기 이전으로 인한 북한의 과도한 자율성과 지렛대 증대는, 동·남중국해 및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전략적으로 대립 중인 중국에게 추가적인 변인 통제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러시아 또한 유라시아 서부에서 대규모 전쟁을 수행 중인 상황에서, 극동의 불안정성 증대는 감당하기 어려운 전략적 부담이다. 중·러 양국이 북한과의 '연출된 밀착'을 통해 외교적 협상에서 지렛대를 확보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양국은 북한의 자율적 군사행동이나 과도한 지렛대 행사가 중·러를 직접적으로 연루시키는 상황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 요컨대, 한미일 안보협력이 구조적 전환점(특이점)을 넘겨 중러에 중대한 안보 위협을 초래하거나, 반대로 미국의 쇠락세가 명백해져서 중러 간 경쟁이 재점화되는 등의 구조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한, 중러가 북한으로 첨단 무기체계를 이전할 전략적 차원의 동기는 낮아 보인다.
IV. 북중러 역학과 한국의 전략적 대응을 위한 함의
최근 일련의 사건에 대한 관찰만을 근거로 북중관계를 단순히 '정상(正常)' 또는 '이상(異常)'이라는 이분법적 틀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전략적 판단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북러 간 밀착 현상을 곧바로 구조적 수준의 동맹 관계로 간주하는 해석에도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북한이 러시아에 제공한 포탄·탄약·인력 등에 대한 일정 수준의 반대급부가 존재할 가능성은 상존하나, 구조적 차원에서 볼 때 러시아가 향후 전략적 환경 변화에 따라 북한을 2020년경 아르메니아 수준으로 간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강대국 간 국제정치과 지정학적 요인 등 주요 변수들을 중심으로 북중러 관계에 대한 지속적이고 정밀한 분석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은 기존의 우방국과의 협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한중 간 전략적 소통 가능성도 병행하여 모색해야 한다. 특히, 중국이 구조적으로 한반도의 안정을 중시하는 경향을 고려할 때, 한국이 주도적으로 안정적인 한반도 관리 구상을 명확히 제시하고 이를 능동적으로 추진할 경우, 중국과 일정 수준까지의 협력 기반을 구축하고 발전시킬 여지가 존재한다. 러시아 또한 러-우 전쟁과 한국의 나토와의 협력 강화 이전까지는 동북아시아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또, 현재 미국과 러시아 간에는 정상 및 외교 수장 간의 소통이 지속되고 있다. 이는 러-우 전쟁의 출구 전략이 모색되는 과정에서 한국과 러시아 간 외교적 공간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한국 역시 러시아와의 접촉을 통해 중장기 전략 환경에 부합하는 외교적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을 병행할 때, 강대국 간 전략 경쟁 심화로 인한 한반도 안보 리스크의 증대를 사전에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현재 북중 관계의 일정한 거리감을 단순한 균열로 규정하거나 이를 일시적인 기회로 인식하는 근시안적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장기적인 전략 환경 속에서 주요 강대국에 대한 구조적 이해, 그리고 북한의 전략적 목표와 지위 간의 역학을 균형 있게 분석함으로써 이를 조율하고 우리의 대외 지렛대를 강화할 수 있는 독자적인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하는 데 정책적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신종호 외. 2020. "미중 전략적 갈등의 한반도에 대한 리스크와 우리의 복합 대응전략." 통일연구원.
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 1956. "Economic Rehabilitation of North Korea 1954–56." CIA-RDP79-01093A001100010001-5. Washington, D.C.: Central Intelligence Agency. https://www.cia.gov/readingroom/docs/CIA-RDP79-01093A001100010001-5.pdf.
CIA. 1985. "North Korea's Air Force: Impact of Soviet Deliveries." CIA-RDP86T00590R000400600002-4. Washington, D.C.: Central Intelligence Agency. https://www.cia.gov/readingroom/docs/CIA-RDP86T00590R000400600002-4.pdf.
Radchenko, Sergey. 2024. "The Vietnam War and the Sino-Soviet Split." In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Vietnam War, ed. Lien-Hang T. Nguyen, 529–548.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Shen, Zhihua. 2020. "Revisiting Stalin's and Mao's Motivations in the Korean War." Wilson Center. https://www.wilsoncenter.org/blog-post/revisiting-stalins-and-maos-motivations-korean-war?utm_source=chatgpt.com.
Shen, Zhihua and Yafeng Xia. 2012. "China and the Post-War Reconstruction of North Korea, 1953–1961." NKIDP Working Paper No. 4. Washington, D.C.: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https://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media/documents/misc/NKIDP_Working_Paper_4_China_and_the_Postwar_Reconstruction_of_North_Korea.pdf.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1975. "Record Regarding Kim Il-Sung's Visit to Beijing, 18–26 April 1975."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record-regarding-kim-il-sungs-visit-beijing-18-26-april-1975?utm_source=chatgpt.com.
Zhang, Xiaoming. 2015. Deng Xiaoping's Long War: The Military Conflict between China and Vietnam, 1979–1991.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 전재우_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
■ 담당 및 편집:김채린, EAI 연구보조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8) | crkim@eai.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