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반전평화운동 ‘위축의 악순환’
| 2015-03-14
박송이기자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은 “북한 정책이나 통일 문제, 안보 문제에 대해서 유권자들은 이슈별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를 극단적인 방향에서만 이야기하고 있고, 시민사회는 유권자들의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유권자들이 자신을 대변할 정치적 세력이 없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만약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때와 같이 활발하고 광범위한 반전평화운동이 존재했었다면 김기종씨의 피습과 같은 개별적이고 부적절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대중운동의 우위가 정치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해온 개인들을 제어하고 정정하게끔 이끌어 왔었기 때문이다. 하기에 반전평화운동이란 것이 명멸하다시피 한 한국 사회에서 김기종씨의 피습사건과 같은 일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홍명교 ‘오늘보다’ 편집위원이 ‘테러만 말하는 언론, 김기종 말하지 않으려는 진보세력’이라는 제목으로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홍 편집위원은 김기종 우리마당 독도지킴이 대표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습격한 사건의 한 원인으로 반전평화운동의 허약함을 들었다.
국가보안법으로 진보진영의 자기검열
10년 전,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반전평화운동은 이렇다 할 대중적 흐름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진보진영의 한 관계자는 그 원인의 하나로 진보진영 내 자기검열을 들었다.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고 종북 프레임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진보 안에서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버렸다. 토론의 발언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어 소위 동지를 파는 일이 될 수도 있게 됐다. 국가보안법이 일부 경직된 북한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온실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다보니 통일, 반전평화에 대한 논의가 진보개혁세력 안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북한을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을 자유롭게 못한다. 일부 경직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상의 시장에 나와 대련을 하고 논리도 보강해 나가야 하는데, 국가보안법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김기종씨 같은 일부 고립된 주장들이 여전히 돌출적으로 나타나게 돼 통일운동이나 반전평화운동이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진보정치권 내에서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정치세력은 보이지 않는다. 진보정당 한 관계자의 말. “통일 문제나 반전평화 문제 등에 대해 진보정당이 ‘사상의 자유’로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경화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위 ‘찍히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통일 문제나 반전평화 문제를 ‘사상의 자유’로 접근하다 보면 결국 구 통합진보당 세력하고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같이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런 갈등이 얽혀 있다. 그러다 보니 반전평화운동 부분에 대해 진보정당이 의제설정 능력도 잃어버리고,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을 했던 것처럼 더는 중요한 행위자 역할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북한 문제, 통일 문제, 동북아 문제 등에 대해 원론적 입장을 발표하는 것 말고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진보정치가 반전평화 문제에서 이전과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문제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노동당 관계자는 “평택이든 제주든 미군기지 문제는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전투기지 역할을 한다는 맥락에서 같은 문제다. 평택 이전을 반대하는 논리와 제주 미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논리도 같다. 그러나 10년 전에 민주노동당이 당력을 집중해서 정부 정책에 맞서는 진보정당다운 정치행위를 했다면, 제주 해군기지 때는 그렇지 못했다. 정의당이든 노동당이든 통합진보당이든 모두 주된 행위자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단순히 세력이 나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를 공격한 혐의로 체포된 김기종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6일 서울 종로경찰서를
빠져나와 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사상의 자유’ 싸우는 진보정치세력 없어
이러한 악순환에서 김기중씨 사건은 통일운동이나 반전평화운동의 또 다른 악재로 작동할 우려가 높다. 국가보안법에 근거한 종북 프레임의 강화다. 피습사건이 벌어진 날,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을 주로 변호해왔던 이광철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안정국에 대한 우려를 적었다. “‘전쟁반대’가 목구멍의 가시같이 자꾸만 걸린다. 반미, 종북세력 척결 운운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좋은 불쏘시개가 되지 않을지… 이런 방식의 폭력에 단호히 반대하지만, 공안정국은 더 끔찍하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이날 이 사건을 ‘종북세력에 의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경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고, 배후세력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수사기관은 기본적으로 의심하는 기관이고 가능한 한 범죄행위를 다 찾아내는 것이 소임이다.” 이광철 변호사는 말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사건은 그 의심이 제한 없이, 근거 없이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게 이 변호사의 우려다. 국가보안법 사건은 과잉수사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어떤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자가 있으면, 그 사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정치세력이라고 보고, 또 이를 형성한 배후에는 북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법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와 여론몰이식으로 악용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반전평화운동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일부 반전평화운동 단체는 “이번 사건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란다”며 말을 아꼈다.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과잉수사의 주요 타깃은 통일운동단체나 통일운동가를 향하는 경우가 많다. 전제가 있다. 국민들 사이에 북한에 대한 혐오감이 높을 때 가능하다. 대체로 남북관계가 경색됐을 때 북한에 대해 국민들이 갖는 혐오감도 높다. 이 변호사는 “남과 북이 사이가 좋으면 국민들 사이에서 북한에 대한 혐오감도 준다. 그러나 사이가 안 좋으면 혐오감도 따라서 올라간다. 공안기관이 통일운동단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늘 똑같다. 늘 어느 정도 혐의를 두고 바라본다. 하지만 국민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북한에 대한 시각과 연동돼 때에 따라 달라진다. 3대 세습, 핵실험, 장성택 처형 등 최근 몇 년 사이 북한을 혐오하고 조롱하는 정서가 높아지면서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해서 북한의 입장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일부 통일운동단체들에 대한 시선도 부정적으로 변한다. 그러다 보면 국가보안법 수사과정에서 이들이 쉽게 먹잇감이 되곤 한다”고 말했다. 같은 말을 해도 정권에 따라 처벌을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한다. 종북 프레임의 작동으로 가능한 일이다.
한 청년단체 회원들이 6일 오후 서울 신촌 연대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쾌유를
기원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정지윤기자
북한 문제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종편
무분별한 종북 프레임이 작동하는 데는 종편이 있다. 홍명근 경실련 통일협회 간사는 “통일운동이 대중과의 괴리감이 커지고 있고 운동역량이 축소된 부분이 있는데, 가장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원인이 악화된 언론환경이다. 종편이 출현하면서 남북 문제에 대해서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물론 북한에서 극단적인 문제들이 돌출되기도 하지만 사실 확인도 안 된 이야기들이 무분별하게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는 혐오감을 조장하고, 이는 한국 사회에 ‘북한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질문만 남긴다는 지적이다. 북한문화를 전공한 양훈도 한벗지역사회연구소 대표는 북한에 대한 시각이 언론에 의해 왜곡되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출간된 <북한이라는 수수께끼>라는 책에서는 북한 문제를 다루는 일본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언론이 북한을 무조건 악마화하고 선정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언론의 행태는 사실 한국 언론에도 적용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것을 더 이용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최근 여론조사는 이번 사건이 자동적으로 ‘종북 프레임’을 작동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갤럽이 3월 10~12일 전국의 성인남녀 10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47%가 리퍼트 대사 피습사건을 ‘한 개인의 일탈행위’로 본 반면 ‘종북세력이 벌인 일’이라고 본 응답자는 40%였다. 김기종씨 외에 다른 공범이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이를 ‘세력’으로 보는 응답자가 40%였다. 이광철 변호사는 “‘종북’ ‘북한’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던 대중들까지 이번 일로 종북 프레임을 내면화시키게 될까봐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종북 프레임의 상시화는 통일 문제나 반전평화 문제에 있어서 유권자들을 정확하게 대변할 정치세력이 부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진단이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은 “북한 정책이나 통일 문제, 안보 문제에 대해서 유권자들은 이슈별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를 극단적인 방향에서만 이야기하고 있고, 시민사회는 유권자들의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유권자들이 자신을 대변할 정치적 세력이 없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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