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硏 연속강좌 '역사 속의 젊은 그들'] 민족주의+세계주의 꿈꾼 '20세기 복합론'… 21세기, 뒤늦은 성공을 기대한다](../images/bg_tmp.jpg)
국제정치학자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강의하는 동아시아연구원(원장 이숙종) 연속강좌 '역사 속의 젊은 그들'(3월 3일부터 29일까지 총 8회, 매주 월·수 오후 6시)이 열띤 수강 열기 속에 이어지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조선일보 후원으로 지난 17일과 22일 서울 여의도 유진투자증권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좌의 주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 김양수와 안재홍이었다.
김양수 '식민지 국제정치학'
식민지 시대, 환상에 젖었던 국제협조주의 허구 꿰뚫어… 세력균형주의 최초 분석도
안재홍의 '민세주의'
"죽은 한국이 살기 위해선 개인我 벗어나 인류아로… 국제적 민족주의 절실"
국제정치학자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가 강의하는 동아시아연구원(원장 이숙종) 연속강좌 '역사 속의 젊은 그들'(3월 3일부터 29일까지 총 8회, 매주 월·수 오후 6시)이 열띤 수강 열기 속에 이어지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조선일보 후원으로 지난 17일과 22일 서울 여의도 유진투자증권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좌의 주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 김양수와 안재홍이었다. 하 교수가 직접 정리한 강좌 요지를 소개한다.
하영선 교수 강의 요약
20세기 초·중반 언론인·기업인으로 활동했던 김양수(1896~1969)는 잊혀진 인물이다. 더구나 그가 남긴 국제정치 시론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버려져 있다. 1924년 '개벽'에 실린 '세력균형주의와 국제협조주의'를 비롯한 몇 편의 글을 찾아서 소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 지금부터 꼭 100년 전 '국제정치적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35년 만에 '국제정치적 출생'의 기쁨을 맞이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새 전쟁을 막기 위해 국제정치학이라는 새 학문이 탄생했듯이 한국도 국망(國亡)의 비극에서 국생(國生)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당연히 한국 국제정치학의 탄생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의 한국 국제정치학은 황무지였다. 식민지에서의 해방은 국제 군사역량의 결정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필요한 도움을 받으려면 아시아·태평양 국제질서를 제대로 읽고 그 속에서 미·일 관계를 정확하게 전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대 국제협조의 허상 속에 미·일 전쟁은 물론,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1920년대 말 세계공황에 따른 세계자본주의의 붕괴를 낙관했고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오판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공과 함께 수많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논객들이 전향(轉向)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한반도는 충분한 준비 없이 광복을 맞이함으로써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김양수는 당시 영국과 일본의 주류 담론이었던 국제협조주의의 허구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아시아 태평양의 <세력균형을 위한 1922년 워싱턴회의가 불러올 미·일 간의 각축 가능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국제협조주의라는 구심력과 세력균형주의라는 원심력의 동학(動學)이라는 흥미 있는 틀로 읽어보려는 최초의 시도를 했다. 1920년대 중반 짧은 기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국제문제 논설을 썼던 김양수는 미국으로 건너가 5년간 유학생과 언론인 생활을 한 후 귀국하여 기업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더 이상 국제정치 시론을 쓰지 않았다. 그의 노력은 짧고 미완성이었지만 식민지 시기 수많은 시론들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하다.
안재홍의 실패한 '20세기 복합론'
민세 안재홍(1891~1965)의 20세기 복합론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1920년대의 신간회, 1930년대의 민세주의, 해방정국의 신민족주의가 모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복합화의 세기인 21세기를 맞이해서 민세의 실패는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세(民世)라는 아호는 국망의 아픔을 예민하게 겪은 안재홍이 유학 중인 동경에서 '민중의 세상'으로 나간다는 뜻으로 스스로 붙인 것이다. 죽은 한국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개인아(我)를 벗어나서 사회아, 민족아, 인류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민중의 세상에 행복이 깃들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족주의와 세계주의가 복합적으로 결합한 민세주의를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했다. 3·1 운동 후 일본 문화정치의 유혹 속에서 친일파 외에 민족주의 우파들이 자치론을 내세우면서 타협적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의 계급투쟁 노력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두 세력 사이에서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은 신간회 총무간사로서 비타협적 민족주의 좌파의 사실상 중앙당으로 키워보려는 노력을 시도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반발로 결국 해체의 운명을 겪게 된다. 1931년 만주사변과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식민지 민족주의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1930년대 전후의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선진 강대국들이 국제협조주의보다 개별국가주의로 환원하는 속에 민세는 '안'의 복합론에 이어 '밖'의 복합론을 다시 전개한다. '세계로부터 조선에'와 '미래로부터 금일에'서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를 복합한 민족적 국제주의 또는 국제적 민족주의의 형성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기적같이 찾아온 해방정국에서 민세는 식민지시기에 문화무대를 중심으로 펼칠 수밖에 없었던 민세주의를 다시 한번 정치무대까지 확대했다. 그는 민주주의, 민족주의, 국제주의를 복잡화한 신민족주의를 해방한국이 나아가야 할 지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싸우면서 품어야 할 국내외의 상대역량들을 제대로 못 다루고 민세주의를 추진할 중앙당 건설에 실패했다. 이제 21세기 한반도는 뒤늦은 민세주의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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