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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5월의 신록이 유난히 푸르다. 자연의 계절 변화는 어김이 없다. 그러나 정치의 계절은 좀처럼 봄을 맞이하지 못한 채 꽃샘추위를 겪고 있다. 청와대는 재산 공개문제로 어수선하고 여의도는 여야 모두 내부 갈등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내 정치 진용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데 본격적인 국제 정치의 계절은 기다려 주지 않고 성큼 다가오고 있다.

5월의 신록이 유난히 푸르다. 자연의 계절 변화는 어김이 없다. 그러나 정치의 계절은 좀처럼 봄을 맞이하지 못한 채 꽃샘추위를 겪고 있다. 청와대는 재산 공개문제로 어수선하고 여의도는 여야 모두 내부 갈등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내 정치 진용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데 본격적인 국제 정치의 계절은 기다려 주지 않고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5월 중국 방문과 부시 미 대통령의 7월 한국 답방은 단순한 정상들의 만남이 아니다. 짧게는 이명박 정부 5년의 대외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길게는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만남이다. 5월과 6월 두 달 동안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120년 전 개화 지식인 관료였던 유길준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한국 최초의 문명 개화서인 "서유견문"을 집필했다. 유길준이 이 글을 쓰면서 가장 괴로워했던 것은 국제 정치의 이중 압력이었다.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고종 폐위론"을 주장할 정도로 당시 조선을 수중에 장악하고 속국 다루듯 했다. 한편 일본과 구미 국가들은 새로운 문명 표준인 근대 국제체제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두 세력에 끼인 조선의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궁리 끝에 유길준은 이중 생존전략인 "양절체제(兩截體制)"라는 어려운 해답을 제시한다. 중국과는 억압적인 지배 종속관계가 아니라 서로 친한 전통 조공관계를 유지하되 동시에 다른 국가들과는 근대 국제관계를 키워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고 조선은 결국 국제 정치의 격랑 속에 침몰했다.

 

21세기 한국은 다시 한 번 국제 정치적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다. 지난 노무현 정부는 "협력적 자주"라는 답안을 마련했으나 시대에 뒤떨어진 오답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부시 방한 때 발표할 "21세기 전략동맹 비전"에서 그리고 올림픽 성화 봉송 폭력사태로 시끄러운 속에 치를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정답을 보여줘야 한다. 우선 비전은 단순한 말의 성찬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의 갈 길을 보여주는 예지를 담아야 한다. 그러자면 짧은 선언 속에 21세기 한국과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가 함께 살 수 있는 기본 공식이 들어 있어야 한다.

 

첫째, 복합외교 원년의 중요성이다.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밝혔듯이 21세기 한국과 미국은 한반도, 동아시아 그리고 지구라는 복합공간에서 새롭게 만나는 세기적 정치 실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경기 운동장의 구조가 바뀐 것을 양국 모두 명심해야 한다. 둘째, 양국의 새로운 지구적 역할이다. 세계 10위권의 중진국가로서 한국은 필요한 지구적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 역할은 우선 비군사 차원의 경제 무대 중심으로 시작해야 한다. 미국은 미국 이익과 지구 이익을 보다 조심스럽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 양국의 동아시아적 역할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친미와 반미의 편 가르기를 넘어서서 "열린 동아시아"의 터 닦기를 위해서 두 나라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한·중관계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넷째, 한반도문제는 우리 문제이자 동시에 동아시아 그리고 지구문제다. 따라서 한국의 한반도적 역할은 단순히 한반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지구를 위해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한반도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21세기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올림픽 성화 봉송 폭력사태는 동아시아의 지역화 수준을 잘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신화에서 깨어나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중 정상회담도 솔직하게 "닫힌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어려움과 극복 방안부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은 21세기 유길준형의 동아시아 복합화 방안 마련에 힘을 기울여야 하며 중국은 철 늦은 이분법적 편 가르기 국제 정치관을 하루빨리 졸업해야 한다. 동아시아가 또 한 번 닫힌 민족주의의 각축장이 아니라 열린 민족주의의 공연장이 되기 위한 리허설 시간은 촉박하다. 위기를 피하려면 치열하고 신속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영선 서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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