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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이명박호(號)는 예상치 못한 세 장관 후보자들의 낙마라는 돌풍을 맞아 힘찬 출범을 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인사검증 절차를 탓하기도 하고 총선에 미치는 영향들을 계산하느라고 바쁘다. 문제는 훨씬 뿌리 깊은 곳에 있다. 노무현 정부가 과거 청산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미래 건설의 숙제에 실패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선진미래 추구의 꿈에 부풀어 과거 정리의 어려움을 경시한 나머지 출발부터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는 한국이 감동해서 말릴정도로
일본이 과거를 참회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어수선하다.

 

이명박호(號)는 예상치 못한 세 장관 후보자들의 낙마라는 돌풍을 맞아 힘찬 출범을 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인사검증 절차를 탓하기도 하고 총선에 미치는 영향들을 계산하느라고 바쁘다. 문제는 훨씬 뿌리 깊은 곳에 있다. 노무현 정부가 과거 청산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미래 건설의 숙제에 실패했다면, 이명박 정부는 선진미래 추구의 꿈에 부풀어 과거 정리의 어려움을 경시한 나머지 출발부터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새 정부가 돌풍을 잠재우고 다가오는 5년의 비바람 속에서 순항하려면 지고 있는 과거의 짐을 제대로 정리하면서 동시에 수평선 너머 미래의 목표를 향해 달릴 수 있어야 한다.

 

지난해 8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투하라는 악몽을 되새기면서 동아시아의 비핵화를 얘기하자고 열린 국제회의에서 나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히로시마는 원폭의 히로시마를 넘어서서 21세기 미래의 매력도시 히로시마로 새로 태어날 때가 됐다"는 문제 제기를 조심스럽게 했다. 히로시마 청중들의 반응은 착잡했다. 지난주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일 간의 혈전 속에서 1만 명이 넘는 징용 한국인을 포함, 수많은 현지인들이 목숨을 잃은 오키나와 전투를 기념하는 평화공원의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인간들이 연출한 지옥의 현장을 재현해 놓은 자료실들을 거쳐 출구로 나오면서 마주치는 망망대해 남태평양의 파노라마 전경은 천국이었다. 오키나와의 미래는 그곳에 있었다.


한국 새 정부의 등장과 함께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줄다리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늘이 어제의 굴레를 벗어나서 내일의 지표를 향해서 굴러가려면 내일의 꿈이 어제의 악몽을 잊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은 이런 역사적 셈법에 인색하다. 역설적으로는 천만다행인지 모른다. 일본 국내총생산(GDP)은 "잃어버린 10년"의 어려움을 겪었어도 세계경제 2위의 5조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중국의 3조 달러, 한국의 1조 달러, 아세안 10개국의 1조 달러를 합쳐 보면 일본경제는 여전히 동아시아 경제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지난 반세기 동안 역사적 셈법에 보다 충실했다면 오늘의 아시아는 훨씬 더 일본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후쿠다 총리는 지난 연말 중국 베이징대학의 젊은이들에게 "호혜협력", "국제공헌", "상호이해·상호신뢰"의 세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략적 호혜관계"를 기반으로 아시아와 세계의 밝은 미래를 함께 창조하자고 연설했다. 일본이 이 길의 선두에 서서 아시아의 친구들을 끌고 가는 길은 간단하다. 일본형 아시아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2020년이면 일본과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일본이 대국다운 대접을 받으려면 "마지막 10년"의 기회에 역사를 위한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할 때다.

 

3·1절 아침을 맞이해서 과거와 미래의 균형감 회복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다시 풀어야 한다. 금년은 대한민국 환갑잔치의 해다. 지난 60년은 19세기 중반 이래 일제 식민지 시기까지 빚진 과거사의 청산기였다. 남들이 수백 년에 걸쳐서 마련한 안보화,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를 단기 속성반으로 마쳤다. 두 번째 환갑을 지낼 21세기의 60년은 명실상부한 미래사의 건설기다. 다만 명심할 것은 선진미래는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21세기 한국은 여전히 과거와 미래의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변환의 60년을 겪어야 한다. 한국의 진보는 과거를 강조하고 보수는 미래를 강조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우리는 한 눈으로는 미래를 내다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과거를 되돌아볼 줄 아는 두눈박이들을 제대로 골라서 밀어줘야 한다. 과거 청산이나 미래 건설만을 강조하는 외눈박이의 시대는 하루빨리 지나가야 한다.

 

다가오는 60년의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강조하면 일본은 우리가 감동해서 말릴 정도로 새롭고 과감한 21세기형 과거사 반성과 청산으로 화답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속에서 비로소 각생(各生)이 아닌 공생(共生)의 동아시아가 자리 잡기 시작할 것이다.

 

하영선 서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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