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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난 19년간 한국 정치에서 일어난 변화 중 가장 긍정적인 것을 꼽는다면 진보와 보수의 양성화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시기 "진보"는 금기어였고 오로지 지하로 잠복한 형태로만 존속할 수 있었다. 민주화 직후 상황은 역전되어 "보수"는 ‘수구반동’과 별로 구분되지 않는, 그래서 "나는 보수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기는 뭔가 좀 멋쩍은 기피어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난 19년간 한국 정치에서 일어난 변화 중 가장 긍정적인 것을 꼽는다면 진보와 보수의 양성화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시기 "진보"는 금기어였고 오로지 지하로 잠복한 형태로만 존속할 수 있었다. 민주화 직후 상황은 역전되어 "보수"는 ‘수구반동’과 별로 구분되지 않는, 그래서 "나는 보수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기는 뭔가 좀 멋쩍은 기피어였다.

 

세월이 흘러 몇 차례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지금, "진보"와 "보수"는 한국 정치에서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단어가 되었다.

 

정치·경제·사회적 현안들을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세력 간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대립"은 보수와 진보가 이제 양성화 단계를 넘어 뚜렷한 결정체로 변하고 있는 결정화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 "참여정부" 하 주요 의제들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입장은 대단히 명료하다.

 

보수는 한·미 FTA 체결에 찬성하고, 진보는 반대한다. 보수는 작통권 환수에 반대하고, 진보는 찬성한다. 보수는 한·미·일 공조를 통해 북한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주문하고, 진보는 미·일의 대북 "강경몰이"를 경계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강조한다.

 

보수는 과거청산을 "정치포퓰리즘"이라 폄하고, 진보는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할 "때늦은 과업"이라고 평가한다. 보수는 "국제표준" 삼성을 칭송하고, 진보는 비정규직과 노숙인을 걱정한다. 보수는 한탄강댐을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하고, 진보는 "애초에 잘못 끼운 단추"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올해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 사회단체들은 8·15 기념 집회를 따로 개최했다.

 

보수와 진보의 결정화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상호 경쟁과 대립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건전한 변화이다. 그것을 "사회혼란"으로 오해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권위주의적 단원주의로부터 민주주의적 다원주의로 미처 이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구태의연한 "보혁상보론"이나 유명무실한 "중도통합론"보다는 보수와 진보가 각기 제대로 서야 한다는 보혁대립론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훨씬 더 적절한 주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보수와 진보의 더 효과적인 결정화를 위해 두 가지 추가적인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첫째는 보수와 진보 각자의 변화이다. 보수는 시대 상황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더 이상 반공·반북·반김 등 일련의 "반(反)"만으로는 그 정체성을 유지해갈 수 없다. 시장이면 시장, 자유면 자유, 준법이면 준법, 자신들이 표방하는 가치를 분명히 하고 자기 희생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진보"해 나가야 한다. 진보 또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낼 수 있도록 "보수(補修)"되어야 한다. "핍박과 탄압의 대상"으로서의 진보에 대해 국민들이 가진 동정심과 도덕적 채무감은 격감하고 있다. 국가의 장래에 대해 확실한 비전과 실사구시적인 대안을 유능하고 순발력 있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진보 역시 국민들로부터 급속히 외면당할 것이다.

 

둘째는 보수와 진보의 주요 정당으로의 제도화이다. 사회 세력으로서의 보수와 진보는 다양한 시민단체를 통해 실체화되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어느 당이 "보수"인지 어느 당이 "진보"인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주요 정당들에는 보수와 진보가 섞여 있고, "순수" 진보 정당은 여전히 미약하다. 사회 내의 보수와 진보 세력을 효과적으로 대표할 정당들이 존재하지 못할 때 진보와 보수는 아무런 매개나 여과 없이 충돌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는 혼란스러워 보이며 국가는 무기력해 보인다.

 

쇠고기 등급에서 상등육은 초이스(choice)라고 한다. 정치도 국민에게 분명한 선택(choice)을 제공할 수 있어야 상등정치(上等政治)이다. 상등 민주정치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서로 다른 비전을 가지고 국민을 대상으로 경쟁하고, 경쟁의 결과 승리한 세력이 책임을 지고 국정을 운영하는 체제이다. 대선을 1년 남짓 남긴 지금, 분명한 비전과 알찬 정책대안을 가지고 참된 보수와 진보를 구현하는 정당들이 등장하여 다음 대선에서는 한국에서 상등 민주정치 시대가 개막될 수 있기를 희구해 본다.

 

김선혁 EAI 분권화센터 소장 · 고려대학교 교수

6대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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